▲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친족 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걸, 저는 자식이 뿌리가 돼야 하는 시간이 됐다고 표현합니다. 그동안은 부모님이 내 뿌리가 돼 내가 열매로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뿌리였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이제부터는 내가 땅속으로 들어가 뿌리가 돼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연결된 가지와 열매들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에게 양분을 제공해야 합니다.

뿌리로 살아야 하는 때가 됐는데도, 이걸 거부하고 땅 위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새소리를 즐기고 살면, 가정이 원만해지지 않고 올바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부모님이 뿌리가 돼줬기에 내가 땅 위에서 햇빛을 보면서, 열매가 돼 햇볕을 즐기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서 내가 그런 일을 해야 합니다.

이를 사회적으로 확장하면 사회의 원로가 돌아가신 일은, 이제부터 내가 그 자리에서 원로에 해당하는 일을 해줘야 하는 때가 됐다는 말입니다. 내가 원로급의 품격을 갖췄든 못 갖췄든, 해 아래 세상과 이별을 고한 원로의 자리를 이제부터 나도 맡아서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원로의 자리가 내게 준 몫을 다른 사람에게 무책임하게 떠넘기면, 사회가 굽어진 길로만 가고 올바르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제가 여전히 좋아하는 사회의 원로 모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이런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제게 남겨진 시간을 헤아려봤습니다.

공식적으로 저는 ○○○○년 ○월 ○일이면 목사직에서 은퇴해야 합니다. 정년을 75세로 연장한 교단도 있지만, 현재까지 대부분의 한국 교단에서 정한 목회자 은퇴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저의 정년은 ○○년입니다.

그래서 제게는 목사로 ○○년 정도 살아야 하는 시간이 남겨져 있습니다. 연말이고 해서 이 시간 동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이번 기회에 정리해 봤습니다.

○○년이 길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살아보니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은 것도 20년이 다 돼 가는데, 그 20년이 바람결에 훌쩍 흘러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년 역시 바람결에 흘러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람결에 보내야 할 것들, 제가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표로 만들어 하나씩 살펴봤습니다.

○○년이라는 바람을 맞고 난 후의 시간은 물음표로 남겨뒀습니다. 그때 뭘 해야 하는지는 아직 모르니까요. 청소년·청년을 위한 인문학 교실을 열어서 독서법과 글쓰기 강의를 재능기부로 제공하고 싶은데, 이건 제 바람이니 먼저는 물음표를 앞세우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제게 남겨진 시간을 헤아려 보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리했더니 마음이 한결 가뿐해집니다.

해 아래 세상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입니다. 때가 때인지라 <시편>에 나온 모세의 고백을 떠올려 봅니다. 그의 시에 나온 표현처럼 날아가는 것같이 빠르게 지나간다는 7~80년의 세월이 이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려고 합니다.

이 시간을 위해 여러분은 뭘 준비해 놓으셨습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코로나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세태는 우리에게 뭘 요구할까요.

왕조를 창업한 후 번영하기 위해 창업(創業)·수성(守成)·경장(更張)의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창업·수성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맹자(孟子)인데, 그는 왕조가 덕을 쌓아야 창업과 수성을 이룰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시대 율곡은 선조에게 이것에 이어 경장을 말했습니다.

율곡은《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선조가 조선을 경장하지 않으면, '토붕와해(土崩瓦解), 땅이 무너지고 기왓장이 깨지는, 어떤 사물이나 조직이 와해 되는 아주 불행한 일이 앞으로 벌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임진왜란 때 조선은 거의 박살이 났었습니다.

그런데 경장은 개인에게도 필요합니다. 열매로 살던 때가 수성이라면, 뿌리가 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 몫을 짊어져야 하는 일이 경장입니다. 2022년이 여러분에게 올바른 수성과 경장의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세이프타임즈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 연재, 칼럼집 <아나돗편지(같이 비를 맞고 걸어야 평화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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