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목욕은 청결과 피로회복 등의 미용과 건강을 목적으로 하지만 삼국시대 목욕은 지금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삼국유사 등 고문서에는 당시 목욕이 성행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나온다. 목욕재계 기원인 '계욕(禊浴)의 날(3월 삼짓날 목욕 하는 날)'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 신화에서 비롯됐다. 계욕의 날 태어난 가야 시조 김수로왕도 목욕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신라 초기 목욕재계를 계율로 삼는 불교가 전래되면서 신라인들은 자주 목욕을 하게 된다. 불교의 전래를 통해 향 문화 발달과 목욕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게 됐다. 사찰에 공중목욕탕이 생겼고, 가정에도 목욕시설이 마련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 관헌 익선 아간이 득오를 데려다 일을 시킨 뒤 돌려 보내지 않아 죽지랑이 익선을 벌 주려하자 익선이 도망갔다. 그의 아들을 붙잡아 성안의 연못에서 강제 목욕을 시켜 형벌을 대신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목욕을 면죄 수단으로 삼은 것으로 신라인들은 몸의 청결을 통해 마음도 깨끗해진다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도 목욕을 언급한 내용이 있다. 서천왕 17년(286)에 "왕의 동생 일우와 소반이 모반을 하였을 때 질병을 사칭하고 온탕에 가서 온갖 무리들과 유락(遊樂)을 즐겼다"는 내용이 있다. 온탕이라 함은 아마도 지금의 온천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질병치료에 온천을 많이 활용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백제시대에도 목욕하는 모습을 담은 유물이 발견됐다. 1993년 부여 능산리 봉래산 사찰터에서 출토된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 뚜껑에는 5명의 신선들이 천상의 소리를 연주하며 장쾌한 폭포수 아래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목욕을 하는 모습이 조각돼 있다. 천하가 태평할 때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으로 목욕이 편안함을 주는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목욕에 대해 신라는 신심일체의 모습, 고구려는 질병치료, 백제는 태평할 때 편안함을 보여준다. 다소 시각의 차이는 있겠지만 당시의 목욕은 청결의 의미와 함께 보다 더 큰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목욕문화를 알 수 있는 삼국유사(왼쪽 사진)과 국보 제287호 백제 금동용봉 봉래산 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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