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신 칼럼] 파학과 신뢰
[정이신 칼럼] 파학과 신뢰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 승인 2021.08.13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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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돗학교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때 배운 게 저희가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한 단상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라면 힘든 일이 생겨도 그 자리를 지키는 게 좋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의 연결고리가 나에게 그 자리에 있기를 의무로 요구할 때는, 거친 오해가 나를 에워싸도 이를 견디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떠나야 할 자리라면 아무리 많은 영화가 그 자리로 인해 주어져도 과감하게 떠나야 합니다.

신(信)은 사람(人)과 말(言)의 결합입니다. 이 글자의 구성처럼 사람이 하는 말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떠나야 할 자리에 계속 눌러앉아 있으면, 자리가 주는 유혹으로 인해 자꾸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떠나는 게 좋습니다.

아나돗학교를 찾아온 재생(齋生)에게 첫 수업시간에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통(一統)된 한반도의 밝은 미래를 펼치기 위해 이제 꿈을 가꿔야 한다. 이를 위해 공부가 필요한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자리를 지키며 스스로 실력을 키워라. 그러나 이게 필요 없는 사람은 떠나는 게 좋다. 굳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끌려 나오듯 학교에 오지 마라."

▲ 정이신 논설위원
▲ 정이신 논설위원

아나돗학교를 운영하면서 어설프게 동정심이나 인정에 끌려 떠나야 할 사람을 붙잡으면 다른 재생에게 피해가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 하고 싶은 일과 해줘야 하는 일을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퇴학이란 말 대신에 파학(派學) 제도를 만들어 다른 선생을 찾아 학교를 떠날 수 있게 했습니다.

파학은 아나돗학교가 제공할 수 없는 다른 게 필요한 북향민이 부담 없이 학교를 떠날 수 있도록 만든 교칙입니다. 학교에서 제정한 약속이 쓸모없어진 재생을 파학할 때는, 어디에서 살든지 서로에게 믿을 만한 사람이 되자고 작별인사를 합니다.

교칙을 제정한 건 시행착오를 통해 축적한 경험 때문입니다. 인간이 누군가를 믿는다는 건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 온 사람들을 내가 가진 희망의 힘으로 믿는 게 어찌 쉽겠습니까. 사람들을 믿는 게 내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믿지 않게 됩니다. 동물적 본능과 다른 예언자적 상상력을 갖고 있어야 사람들을 믿는 게 가능합니다. 만약 내게 이게 없으면 이곳에서 태어나고 같이 자란 가족도 믿기 힘듭니다.

가족을 놔두고 혼자서 이 땅까지 온 북향민은 여러 가지 환경 변화의 후유증으로 인해 희망의 상상력이 매우 빈약합니다. 대한민국에 와보니 온통 자기와 다른 환경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들만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을 위한 신뢰 관계를 쉽게 구축하지 못합니다.

아나돗학교에서는 유예기간을 정해 두고, 탈북 과정의 후유증으로 흐려진 판단력이 제 자리로 돌아오게 돕습니다. 만약 이 기간에 서로를 향한 믿음을 가꾸지 못한 재생이 있으면 그를 위해 파학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믿기 힘들 때는 거꾸로 다른 사람들에게 믿을 만한 사람이 돼 보라'고 조언합니다. '북향민인 내가 대한민국의 일반 사람들에게 믿을 만한 존재가 됐는지, 돼 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꿈을 키워주려는 학교와 사람마저 이익을 얻는 수단으로 자기 편익에 맞춰 이용하는 일이 생깁니다.

저희는 하나님이 우리 세대에게 주신, 분단된 한반도를 일통하는 꿈을 가꾸기 위해 학교를 운영합니다. 이 꿈이 저희에게 없었다면 학교를 운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지금도 이런 학교가 여전히 필요한지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제는 필요 없다'라는 응답이 오면 언제든지 문을 닫으려고 늘 기도하며 준비합니다.

이 땅에서 삶의 궤적을 그렸던 지난 세월 동안 여러분은 몇 번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믿을 만한 사람이 됐습니까. 여태껏 믿을 만한 사람이 돼 본 적이 없다면, 이제 사람들을 믿지 못하겠다고 탓하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믿을 만한 사람이 돼 보십시오. 아마도 하나님의 나라가 거기서부터 시작하고 있을 것입니다.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세이프타임즈에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 연재, 칼럼집 <아나돗편지(같이 비를 맞고 걸어야 평화가 보입니다)> ⓒ 세이프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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