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의 작품 '양산을 쓴 여인'

▲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작품 '양산을 쓴 여인' (1875·캔버스에 유채·100×81㎝) ⓒ 워싱턴국립미술관
▲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작품 '양산을 쓴 여인' (1875·캔버스에 유채·100×81㎝) ⓒ 워싱턴국립미술관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그림이 있다.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느껴져 따스함이 가슴에 잔잔하게 퍼지는 느낌. 이 그림이 바로 그런 그림이 아닐 런지.

봄빛 가득한 들판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양산을 쓰고 있다. 그녀의 뒤로 보이는 맑은 하늘과 눈부시게 빛나는 새털구름은 대기의 움직임으로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며 봄의 기운을 한껏 연출하고 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여름 직전의 연둣빛 풀잎들을 살살 흔들고, 여인의 드레스자락도 봄바람에 가볍게 살랑인다. 인상주의 미술 특유의 대충 그린 듯한 붓터치 때문에 여인의 얼굴을 정확히 알아볼 수는 없지만,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아름답다는 것을.

▲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 부분(카미유의 모습)
▲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 부분(카미유의 모습)

여인의 이름은 '카미유'.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아내다. 지금 그녀는 남편의 요구에 따라 긴 시간 햇볕 아래 서서 모델이 돼 주고 있다. 남편의 그림이 잘 팔리지 않아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없지만,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 본가와 연을 끊을 만큼 남편의 사랑이 충만했기에 그녀는 지금 자신의 일생 중 그 어느 때보다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내는 중이다.

가늘게 떨리고 있는 얇은 베일 속 카미유의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거기엔 자신을 그리고 있는 화가이자 사랑하는 남편인 모네가 있다. 누군가의 눈을 들여다본다는 건 상대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의 표출이다. 지금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교감하고 있다.

▲ 모네의 자화상 (1886·캔버스에 유채·46×56㎝) ⓒ 개인소장
▲ 모네의 자화상 (1886·캔버스에 유채·46×56㎝) ⓒ 개인소장

프랑스 인상주의 미술의 창시자로 불리는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젊은 날 고생을 사서 하느라 생활고에 치여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사실 그는 굉장히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으나 부모가 결사반대하는 결혼을 하는 바람에 집에서 보내주던 경제적 지원이 끊겼기 때문이다. 이유는 뻔했다. 며느릿감이 자신들과 격이 안 맞는 빈민가 출신인 것도 모자라 당시 평판이 좋지 않은 직업인 모델 출신이라는 게 문제였다.

모네가 카미유를 처음 만난 건 1865년 절친 화가인 바지유의 화실에서다. 카미유를 보자마자 모네는 첫눈에 반했다. 모네는 그녀를 모델로 <초록 드레스의 여인>을 그려서 그해 살롱전에 당선된다. 카미유는 모네에게 창조적 영감을 샘솟게 만드는 유일한 뮤즈가 된 것이다.

화가와 모델의 만남. 둘만 있는 곳에서 상대를 대놓고 빤히 쳐다볼 수 있다는 건 아주 특별한 일이다. 한 마디로 사랑에 빠지기 쉬운 분위기에 놓였다는 의미다. 고지식한 세잔은 모델을 보고 그릴 때 사과와 오렌지처럼 단순한 대상으로만 취급한다고 했지만, 솔직하고 감성이 풍부했던 모네는 카미유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 부분(아들 장의 모습) ⓒ 워싱턴국립미술관
▲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 부분(아들 장의 모습) ⓒ 워싱턴국립미술관

카미유와 조금 떨어진 곳에 들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볼이 상기된 어린 소년이 보인다. 두 사람의 아들 장이다. 한동안 안 먹어도 배부를 만큼 서로를 사랑했던 그들 사이에 생긴 사랑의 결실이다. 카미유와 장은 모네의 그림에 수없이 자주 등장하며 인상주의 미술을 완성하는 데 한 역할을 맡게 된다.

그러나 뜨거운 사랑만 가지고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 차가웠다. 비싼 집세와 물가를 감당하기 어려워 파리를 떠나야 했다. 아르장퇴유로 이사한 후 모네 가족은 매일 같이 들판으로 나와 야외에서 시간을 보냈다. 인상주의 미술이 아르장퇴유의 들판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네는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빛과 색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인상주의 미술의 출발이었다.

▲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들판' 부분 1873(왼쪽), '정원의 카미유와 장' 1875
▲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들판' 부분 1873(왼쪽), '정원의 카미유와 장' 1875

더 이상 그는 어두운 화실에 앉아 전에 봤던 풍경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리지 않았다. 튜브물감을 들고 화실 밖으로 나가서 해가 질 때까지 풍경 속에 들어가 그림을 그렸다. 지금은 인상주의 미술의 거장으로 추앙받는 모네지만, 당시에는 시간의 변화에 따른 순간의 느낌을 담고자 빠른 붓놀림으로 그림을 그리다보니 다듬어지지 않은 붓자국으로 인해 미술비평가들과 세상으로부터 벽지보다도 못 한 그림이라며 조롱당하기도 했다.

모네의 그림이 세상에서 인정받으며 화가로서 성장을 거듭하고 있을 때 안타깝게도 카미유는 1879년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 그림이 그려진지 4년 후다. 물론 혼자 남은 모네는 수절하지 않고 다른 여인과 재혼하지만, 첫사랑에 대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리움과 미안한 마음을 모네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가슴 깊은 곳에 품고 살았으리라.

▲모네가 수잔을 그린 그림 '야외사생을 위한 습작: 왼쪽으로 돌아선 양산을 쓴 여인' (1866·캔버스에 유채·131×88㎝)(왼쪽), '양산을 쓴 여인' (1866·캔버스에 유채·131×88㎝)(오른쪽) ⓒ 오르세미술관
▲모네가 수잔을 그린 그림 '야외사생을 위한 습작: 왼쪽으로 돌아선 양산을 쓴 여인' (1886·캔버스에 유채·131×88㎝)(왼쪽), '양산을 쓴 여인' (1886·캔버스에 유채·131×88㎝)(오른쪽) ⓒ 오르세미술관

양산을 쓴 여인을 그린 그림은 이 그림 말고 또 있다. 모네는 두 번째 부인 알리스와 재혼할 당시 그녀가 데려온 6명의 자녀 중 셋째 딸 수잔을 모델로 하여 이와 비슷한 구도로 1886년에 두 작품을 연달아 그렸다.

하지만 카미유가 양산을 쓰고 있는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같은 포즈로 그려진 수잔을 보고 한눈에 데자뷰를 느꼈을 터. 수잔을 그렸지만 왠지 카미유를 떠올리게 된다. 모네는 어떤 심정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까.

▲ 카미유의 모습(왼쪽), 수잔의 모습(가운데, 오른쪽)
▲ 카미유의 모습(왼쪽), 수잔의 모습(가운데, 오른쪽)

카미유를 그린 그림에는 분명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는 모습인데 수잔을 그린 그림에는 얼굴 표정을 전혀 알아 볼 수 없도록 흐릿하고 모호하게 표현했다. 차마 그려 넣지 못한 것처럼.

재혼 후 모네는 지베르니에 정착해서 정원을 가꾸는 일과 그림에 파묻혀 살았다. 수잔을 그린 그림은 분명 지베르니에 살 때 그려진 그림이지만 모네의 마음은 아직 카미유와 함께 살던 아르장퇴유에 머물고 있었던 걸까. 꿈에서라도 돌아가고 싶은 그 시절의 그 들판에 카미유를 다시 불러 세우고 싶었던 건 아닌지.

첫사랑, 그 단어만으로도 사람들의 가슴에 파문이 인다. 점점 파동이 깊어지고 넓어지면서 명치 언저리쯤 내장 어딘가에 숨어있던 시큰하고 날카로운 추억이 설렘처럼 존재를 드러낸다. 적잖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때의 감정이 되살아나고, 저항할 틈도 없이 일상에서 박리되어 감정의 싱크홀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설레고 지나치게 배려하던 순수의 마음을 지금은 어디에 두었는가. 비오는 아침에 커피 볶는 냄새가 코로 훅 들어왔을 때 걸음의 속도를 줄이고 자신도 모르게 가게 안을 흘깃 들여다보듯, 이 그림을 보며 잠시 각자의 카미유를 마음의 화폭에 그려보는 시간이 되기를 ….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충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한 뒤 동 대학원에서 미술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충북 단양군에서 교편을 잡은 뒤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충북대학교 미술학과에 출강하며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현재 서울 성수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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