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행복권 헌법으로 보장돼야

▲ 김재정 전문위원·공인노무사
▲ 김재정 전문위원·공인노무사

'정인이 사망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양모는 아이가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때렸다고 한다.

의사는 정인이 사망 당일 뱃속이 온통 염증과 출혈로 뭘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한다. 사망하던 날 어린이집에서도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선생님께 안겨만 있다 양부가 오니 체념한 듯 걸어갔다. 그 날 정인이는 태어난지 16개월만에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노동자가 인간 대접을 받기 시작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길어야 겨우 100년이다. 노예는 사고 팔리지만, 노동자는 사고 팔지는 않았을 뿐이다.

그 이전에는 어린 아이에게 노동을 시키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었다. 요즘같이 하루 8시간씩 노동을 시킨 것이 아니다. 쉬는 시간도 없이 그 두 배를 시켰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석유왕으로 유명한 록펠러는 노동자들에게는 악마와 같은 존재였다. 록펠러가 노동자들에게 행한 만행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노동운동을 한다고 총을 들고 나와 노동자를 쏴 죽였다. 그는 항상 총을 옆에 두고 잤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록펠러가 재단을 설립한다고 하자 "그가 저지른 악행은 어떠한 선행으로도 갚을 수 없다"고 했을 정도다.

헌법은 인간으로서의 기본권과 인권을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왜 노동자의 인권을 별도 보장하고 있을까. 결국 노동자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받으면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지 않을텐데 왜 굳이 '노동3권'을 보장하고 있을까.

노동자가 인간 대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이 노동3권이 보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약자는 사실상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인권도 보장받지 못한다.

가진 자의 노동자 탄압은 특별법 제정 정도로 해결되지 않았다. 특별법은 또 다른 특별법으로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 최상위 법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게 되면서 노동자의 인권이 인간의 권리로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이다.

다시 우리는 정인이의 죽음을 돌이켜 봐야 한다. 양모는 아이의 변에서 냄새가 난다고 밥을 먹이지 않고 16개월이 됐음에도 이유식을 먹였다고 한다.

뜨거운 것을 그대로 먹여 입 안이 온통 헐었다고 한다. 정인이가 사람이었을까. 과거 노동자와 같이 인간이 아닌 그 무엇으로 인식되고 있지 않았을까.

노동자는 죽음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 달라고 입으로 호소하지 않았다. 그들이 노동인권, 노동3권을 호소할만한 지식을 그 당시 가지고 있었을까. 입이 있어도 말 못하는 존재였다. 단지 수많은 핍박 속에서의 죽음으로 고통을 호소했을 뿐이다.

정인이의 고통과 죽음이 과연 무엇을 호소하고 있을까. 국민들과 정치인들은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그런데 대책은 없고 처벌만 있다.

'아이들을 학대하지 말라. 학대 시 가중 처벌하겠다'는 특별법 제정으로 넘어가고 있다. 과거 특별법이 제정됐다고 해서 노동자들의 고통이 멈추었을까.

우리는 사회적 강자의 입장에서만 약자를 대변해서는 안 된다.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고는 강자의 사고일 뿐이다.

그래서 대책이 아니다. 특별법은 또 다른 특별법으로 회피될 수 있고, 강자의 힘 있는 대변인으로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

정인이가 고통과 죽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때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정인이는 때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이 학대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해 줘야 한다. 사회는 K자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중산층은 없고 상류층과 하류층으로만 나뉘어지고 있다.

상류층은 사회의 10%로 되지 않을 것이고, 하류층은 90% 이상이 돼 가고 있다. 이 의미는 앞으로 수많은 아이들이 죽어나가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많은 어쩌면 정인이보다 더 깊은 고통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게 될텐데 이를 지켜보는 그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노동자들의 인권이 헌법으로 보장되면서 달라진 점은 살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국가는 헌법에 기초하고 있기에 헌법에서 보장된 것은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 실현시켜 나아가야 한다.

노동자들의 노동3권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더 나아가 노동법이라는 특별법을 만들고 노동청이라는 특별기관을 만들어 국가 예산을 투입해 적극적으로 노동자들을 보호한다.

심지어 노동자들의 노동할 권리를 보장,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실직 시에는 노동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는 복지행정을 실현시켜 나아가고 있다.

이런 행위들이 단순히 복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국가의 책무이자 의무이기에 이를 실현하지 않으면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 된다.

아이들의 인권은 학대받지 않을 권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보호받아야 할 권리, 자라야 할 권리, 더 나아가 행복하게 자라야 할 권리에 있다.

과거 죽음으로만 고통을 호소했던 노동자들을 지식인들이 대변해 노동인권을 주창하고, 노동할 권리까지 주장했던것과 같이 이제는 아이들의 행복권을 지식인들, 더 나아가 모든 국민이 주장해야 한다.

아이들의 행복권을 단순히 부모, 양부모와 같은 개인이나 사설 양육기관에만 떠맡기고 지원책으로 생색만 낼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국가의 책무로 보장해 줘야 한다.

이제는 아이들의 행복권은 헌법으로 보장돼야 할 시기가 왔다. 더 늦는다면 또 다른 제2, 제3의 정인이를 보게 될 것이 자명하다.

정인이는 맞지 않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살고 싶어 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김재정 전문위원·공인노무사 △서울시립대 법정대 졸업 △국제온누리 노무법인 대표 △노동법률 미디어 사람과 법률 대표 △서울전세버스운송사업조합 고문 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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