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돗학교에서는 인문학과 동양고전을 강독합니다. 북향민이 대한민국에 와서 긴 호흡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돕기 위해,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교훈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강사가 목사이기에 처음에는 북향민이 꽤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학교에 오면 먼저 이곳에서 쓰는 용어부터 익혀야 합니다. 우리는 학생이라 하지 않고 거재유생(居齋儒生)의 준말인 재생이라고 합니다. 몇 년을 가르쳐 봤더니 배우기만(學) 하고 몸을 가지런히 하지 않으면(齋), 가르친 게 휴짓조각처럼 이들 곁을 떠돌 뿐이었습니다.

대한민국에 왔지만 여전히 북한식 사고로 사는 그들을 보면서 공부하러 온 이들을 자극하기 위해 재생이라고 합니다. 또 아나돗학교에는 졸업이 없습니다. 몇 년에 와서 공부했느냐만 헤아리는데, 학교를 떠나더라도 같이 숲을 이루고 살라는 의미에서 림(林)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올해가 2020년이기에 지금 공부하고 있는 북향민 재생은 2020림입니다.

​▲정이신 논설위원​
​▲정이신 논설위원​

강독을 진행하는 제 말에 교인이 듣기에 조금 거스르는 대목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장소를 빌려준 교회의 교우가 제가 강독 때 썼던 표현을 듣고 물음을 제기했었습니다. 서로 불편해 질 뻔했는데, 담임목사님이 한마디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북향민을 가르치는 대안학교는 학교일 뿐이다. 이곳에서 무슨 거룩함까지 말해야 하느냐? 거룩함은 교회에서 말하면 되니, 대안학교는 학교로 운영하도록 그냥 둬라!"

하나님이 주신 복이 많습니다. 인문학과 동양고전을 강독했다고 다시는 예배당을 쓰지 말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질문을 한마디로 제압해 버린 목사님을 멘토로 만났으니, 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덕분에 오늘도 거친 입담을 남발하며 강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산기도와 더불어 도시에 있는 도서관으로 가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사람의 무늬를 고치고 마음을 바로잡는 방법을 같이 연구해야 합니다.

태초 이후 무수하게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서도 인류가 여전히 불의와 죄를 버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호모 사피엔스가 계속 발전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지속 가능한 희망은 무엇인지 성령님의 조명으로 찾아내야 합니다. 또 온갖 죄의 사례를 연구해서 왜 부패를 인간의 삶에서 쫓아내지 못했는지 알아보고, 불의의 유혹이 지닌 끈끈함과 허망함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현재 지구에서 살고 있고, 이 땅에서 살 수 있도록 최적화된 상태로 몸을 가꿔 왔습니다. 따라서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땅이 사람에게 준 마음이 뭔지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무늬가 지닌 기하학적 형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을 거부하고 내 주장만 높이 외치면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양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인으로 폭넓게 사고한다 해도, 우리를 감싸고 있는 동양의 환경과 선지식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생각이 천박해집니다. 그래서 북향민에게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동양고전도 가르칩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게 북향민이 대한민국에서 고립된 섬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조그마한 배가 되도록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예배와 교회가 물 위에 우아하게 떠 있는 백조의 몸이라면, 목사의 삶은 물속에서 죽을힘을 다해 물장구치는 백조의 발과 같습니다. 그리고 북향민에게 학교에서 가르치는 게 이런 역할을 합니다. 10여 년 넘게 가르쳐 보니 장기적으로 이 과목들이 북향민이 대한민국에서 우아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백조의 발이 됐습니다.

그동안 작은 오해도 있었습니다. <논어(論語)>에 있는 글을 SNS에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 목사 유니폼을 입은 사람이 쓴 신앙에 관한 글에 왜 <논어>가 들어가 있는지 의아했던 모양입니다. 어떤 사람이 댓글을 달아 놨기에 친절하게 답을 했었습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과 더불어 <논어>를 읽는 목사를 내치지 않고 거둬주시는 분이라고요.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세이프타임즈에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 연재, 칼럼집 <아나돗편지(같이 비를 맞고 걸어야 평화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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