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작품 '꿈'

▲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꿈'(1932·캔버스에 유채·130×97㎝) ⓒ 개인 소장
▲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꿈'(1932·캔버스에 유채·130×97㎝) ⓒ 개인 소장

이 그림은 큐비즘 미술로 유명한 현대미술의 거장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스페인)가 그의 네 번째 뮤즈 '마리 테레즈'를 그린 <꿈>이다.

막 피어나는 꽃처럼 싱그러운 청순미를 풍기는 17살의 마리 테레즈와 우연히 마주친 피카소는 그녀를 보자마자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놓칠까봐 초조할 정도였다. 금발의 순진한 여고생에게 이미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한 키 작은 중년의 유부남이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그리고 싶소. 당신은 나와 함께 위대한 일을 하게 될 것이오."

얼떨떨해 하는 마리 테레즈의 팔을 잡아끌고 서점으로 들어간 피카소는 자신의 그림이 실린 책들을 보여주며 이 그림들을 그린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소개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피카소를 바라보던 마리 테레즈는 그의 팔을 뿌리치며 서점 문을 열고 나가버린다.

급히 뒤따라 나가는 피카소. 6개월 동안 따라다니며 설득한 것도 모자라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가 초상화를 그려주면서까지 끈질기게 구애한 끝에 드디어 그녀는 피카소의 모델이 된다.

피카소의 모델이 된다는 것은 그녀의 모든 것을 피카소에게 준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린 소녀는 한동안 피카소의 열정적인 사랑을 받으며 꿈꾸듯 행복감에 젖어서 살았다. 눈을 감고 소파에 기대어 나른하게 잠든 사랑스러운 마리 테레즈의 모습을 피카소는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붓을 들어 젊고 사랑스러운 애인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그녀의 모습을 그리고 또 그렸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도록 만드는 내적 동기 그 자체였다.

▲ 마리 테레즈를 담은 사진들.
▲ 마리 테레즈를 담은 사진들.

하지만 그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었다. 영원할 줄 알았던 피카소의 사랑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데 그리 많은 세월이 필요치 않았다. 몇 년 후 마리 테레즈는 다섯 번째 여인 도라 마르가 나타나자 잠시 그녀와 오버랩 되다가 이내 피카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새로운 뮤즈에게 정신이 팔린 피카소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이 피카소의 마지막 사랑인 줄 알았지만 결국 네 번째 여인으로 기억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왜 여자들은 나쁜 남자에게 더 끌리는 건지. 2번의 결혼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동거한 여자만 7명. 그 외까지 합친다면 100명이 넘을 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피카소는 내키는 대로 살았다. 그의 작품에 영감을 주는 뮤즈가 나타나면 앞뒤 사정 가리지 않고 그녀에게로 직진했다. 명분은 나름 충분했다. 오직 그녀만이 피카소를 그림 그리고 싶게 만든다는 것.

문제는 그녀들을 모델로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녀들의 몸과 마음은 물론 영혼까지 온전히 피카소 자신이 갖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진액이 다 빨리고 껍데기만 남은 그녀들은 더 이상 자신에게 영감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버려졌다. 나쁜 남자 피카소는 상대의 동의도 없이 새로운 뮤즈를 찾아 떠났다. 그리고 얄미울 정도로 승승장구하며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화가로 대성공을 이룬다.

▲ 피카소가 그린 마리 테레즈의 초상화들.
▲ 피카소가 그린 마리 테레즈의 초상화들.

요즘 시대엔 '구루밍 성범죄'로 다룰 법한 일이겠으나 당시의 정서엔 그런 일이 예술가에게 허용되는 분위기였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가 죽은 지 4년 후 '저승에 가서 피카소를 돌봐야 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안타깝지만 피카소의 최면에 걸린 여인들은 하나같이 그를 원망하기보다 그리워했다고 한다.

92세로 생을 마감한 피카소는 죽기 전날에도 늦은 저녁까지 누드화를 그리며 창작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물론 그의 곁에는 나이차가 46살이나 되는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여인 자클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약 피카소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자클린이 마지막 여인이라는 타이틀을 갖지 못했겠지만, 운 좋게도 그녀는 피카소의 아내 올가의 죽음 이후 마리 테레즈가 그토록 원하던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게 평생 제작한 작품이 5만여 점. 창작열이 폭발한 시기에는 8시간 이상 밥도 먹지 않고 그림만 그리는 일이 허다했다. 새로운 형태와 표현방법에 대한 집착적인 연구와 자신만의 표현세계를 찾으려는 창작에 대한 욕망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피카소를 만들었다.

천재치고는 너무 오래 살았던 탓일까. 아이러니하게도 현대미술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단박에 그의 대표작이 떠오르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한다. 초등학생에게 "뭉크는 무슨 그림을 그렸지?"라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절규>요"라고 답한다.

반 고흐에겐 <별이 빛나는 밤>과 <해바라기>가 있고, 클림트는 <키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모나리자>인데 피카소의 대표작을 물으면 대부분 머뭇머뭇한다. 알긴 아는데 선뜻 입에서 답이 나오질 않는 것이다.

▲ 큐비즘 미술(입체주의 미술) 시작의 신호탄이 된 피카소의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 (1907·왼쪽), 스페인 내전 당시 작은 마을 '게르니카'의 주민들이 프랑코 집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프랑코가 나치와 합작해 게르니카의 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을 고발하는 내용의 피카소 작품 '게르니카' (1937)
▲ 큐비즘 미술(입체주의 미술) 시작의 신호탄이 된 피카소의 작품 '아비뇽의 처녀들' (1907·왼쪽), 스페인 내전 당시 작은 마을 '게르니카'의 주민들이 프랑코 집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프랑코가 나치와 합작해 게르니카의 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을 고발하는 내용의 피카소 작품 '게르니카' (1937)

피카소를 좀 안다는 사람들도 이 질문을 들으면 그들의 머릿속에 피카소의 수많은 명작들을 파노라마처럼 떠올리다가 잠시 미간에 힘을 주며 숙고한 끝에 <아비뇽의 처녀들>이나 <게르니카>를 겨우 입에 올린다. 심지어 마리 테레즈를 그린 <꿈>을 <낮잠 자는 여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피카소가 현대미술 탄생의 주역으로 모더니즘 전체를 아우르는 세계적인 거장임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작품을 제작 시기별로 청색 시대, 장밋빛 시대, 분석적 큐비즘 시대, 종합적 큐비즘 시대, 신고전주의 경향, 초현실주의적 경향 등으로 나눠서 공부해야 될 만큼 그의 작품은 각 시기별로 독특한 형태미를 가지며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피카소의 대표작이 대중에게 제대로 각인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피카소가 제작한 작품수가 다른 화가들에 비해 월등히 많다는 것. 피카소는 화가로 살았던 70여 년 동안 하루에도 여러 점의 그림을 동시에 그리기도 하며 다작(多作)을 했다. 여자가 바뀔 때마다 그림의 스타일이 바뀌었기 때문에 대표작을 고르는 일이 무의미할 정도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 많다. 그리고 그림의 제목이 외국어로 된 경우에는 일부러 외우면 몰라도 일반인들은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한 몫을 한다.

▲ 피카소의 사진이 들어간 애플사의 광고 이미지.
▲ 피카소의 사진이 들어간 애플사의 광고 이미지.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건 바로 작품보다 화가가 더 유명하다는 것이다. 이는 피카소의 그림보다 인간 피카소의 삶과 사고방식이 사람들에게 더 강한 인상을 준다는 의미다.

어느 날 애플사의 건물 외부 벽면이 커다란 현수막으로 뒤덮였다. 그것은 피카소의 사진으로 제작된 거대한 광고용 현수막이었다. 피카소의 그림이 아니라 피카소라는 사람에 주목한 것이다. 피카소는 살아있는 내내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발전했다. 그런 의미로 피카소라는 이름엔 이미 창조와 혁신이라는 개념이 녹아있었다. 스티브 잡스에 의해 21세기에 소환된 피카소는 그렇게 창조와 혁신의 아이콘이 됐다.

대개 천재들은 어렸을 때 반짝이다가도 성년이 되면서 빛을 잃고 사그라들거나, 중년이 되기도 전에 요절을 해버리는 바람에 그저 지나간 시대의 전설로 남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피카소는 한 세기 가까운 삶을 살면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창작에 대한 고민으로 쉽게 붓을 내려놓지 못할 만큼 끊임없이 노력하며 몇 십 년 동안 천재의 자리를 지켜냈다. 그 어려운 걸 해낸 그는 이제 우리에게 살아있는 전설이다.

예술은 인류 역사와 함께 발전해온 분야로 창조의 원천이었고 전복과 혁명을 찬양하며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 피카소는 지금도 우리에게 예사롭지 않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욕먹는 게 겁나? Think different."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충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한 뒤 동 대학원에서 미술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충북 단양군에서 교편을 잡은 뒤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충북대학교 미술학과에 출강하며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현재 서울 성수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 세이프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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