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이신 논설위원
▲ 정이신 논설위원

저보다 먼저 태어났으나, 암을 만나 어쩔 수 없이 그것과 '열애'에 빠져야 했던 배다른 형이 오래전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딸과 아들을 두고서 해야 했던 암과의 열애가 뭐가 그리 좋았는지, 형은 훌쩍 저희를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얼마 전에 형의 딸이 결혼식을 올린다고 해서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굳건하게 자란 조카가 대견했고, 아이를 예쁘게 키운 형수가 고마웠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 형은 이미 우리 집안의 식구였습니다. 그렇지만 뭔가를 그리워했던 형의 모습을 제가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은 형이 세상을 떠나고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형이 했던 행동에는 어렸던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고향에서 살고 있던 형이 암과 어쩔 수 없는 열애에 빠졌을 때, 전해 오는 소식만으로는 도무지 형의 아픔을 헤아리기 힘들었습니다. 목사가 돼 암과 강압적으로 열애를 벌이고 있는 교우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형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됐습니다. 형이 느꼈던, 주어진 날이 언제까지인지 아는 말기 암 환자들이 지닌 고통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게 됐습니다.

상처와 아픔은 상대적입니다. 내가 가진 상처와 아픔이 가장 큰 것 같지만, 절대적으로 이것이 다른 사람의 것보다 크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고통을 느끼는 뇌의 중추가 작동해 감지하는 것이 상처요, 아픔이기에 뇌가 활성화된 정도에 따라 이것을 느끼는 감도는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인간이 지닌 상처와 아픔은 본인이 가장 잘, 그리고 먼저 압니다.

아픔은 온몸으로 느끼기 전에 먼저 뇌에 신호를 전달합니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는 각 지체의 상처와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 뇌를 활성화해야 합니다. 그가 스스로 깨우쳐야 할 잘못을 내가 먼저 지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뇌를 활성화하면 안 됩니다. 그의 잘못을 그가 나보다 더 빨리 알아내도록 기다려줘야 합니다.

어릴 적에는 형에게 이렇게 하지 못했었습니다. 형이 가진 외로움이 지닌 상대적 아픔을 헤아릴 줄 몰랐고, 형의 초상을 치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조카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남도에 있는 고향까지 다녀왔습니다. 조카의 결혼식을 통해 이미 하늘나라로 간 형에게 '그동안 수고했어요'라는 말을 건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형이 가고 난 후 형의 가족이 어떻게 사는지 가끔 전해 들었지만, 조카의 결혼식을 보면서 알게 됐습니다. 간절하게 무엇을 기다리는 것이 있다면, 때론 그것이 삶의 희망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조카의 성장을 뒷바라지했던 형수의 노력을 보면서, 기다릴 게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얼마나 살아가는데 큰 위로가 되는지 알게 됐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됐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끝이 오지 않았기에 준비하며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나라가 완결돼 나타나기를 오늘도 간절히, 내다볼 수 있는 곳까지 목을 길게 빼고 쳐다보며 기다립니다.

그 나라에 가면 창조주 하나님과 저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만나 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번잡했던 이 세상의 기억을 뒤로한 채 먼저 간 형과 형에게 외로움을 남긴 아버지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덧 그때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하는 나이가 됐습니다.

감각계가 단단히 고장 나서 공자의 말처럼 하루에 세 번 스스로 돌아보지 못하고(一日三省), 저의 행동에 관한 판단을 형에게 위탁했었던 시간을 이번 기회에 고향에 묻고 왔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고장이 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소망과 달리 저의 뇌는 여전히 잘못을 인지하는데 무척 더디고 서툽니다.

분명히 평지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낭떠러지 위를 걷는 것처럼 행동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도 이번 기회에 삶에 얽힌 매듭을 하나 풀어냈으니, 이제 서둘러 다른 매듭을 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겨야겠습니다.

■ 정이신 논설위원· 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저서 <아나돗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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