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벽지에서 나온 수군진촌 한시 일부분 ⓒ 문화재청
▲ 벽지에서 나온 수군진촌 한시 일부분 ⓒ 문화재청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태안 신진도 고가에서 조선수군의 명단이 적힌 군적부와 한시를 발견한 이후 수거된 벽지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수군 진촌의 역사와 서정을 느낄 수 있는 여러편의 한시 등을 추가로 발견했다고 23일 밝혔다.

이 고가는 상량문에 적힌 청 황제인 선종의 연호 '도광(道光) 23년'이라는 명문으로 1843년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고가에 거주했던 후손 최인복씨에 따르면 가옥은 대청을 중심으로 'ㅁ'자형 건물 배치 구조를 하고 있었다.

260평의 대지에 방 5칸, 광 6칸, 부엌 3칸, 외양간 1칸, 말 우리 등을 갖추고 있었다. 실측결과 현재는 'ㄷ'자형 구조만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광 6칸이 존재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안흥진 수군을 관리했던 관가 건물로 추정된다.

발견된 한시 '聞新設開宴四方賢士多歸之'(새로 짓고 잔치를 베푼다는 소식을 듣고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였다)는 1843년 7월 16일 수군의 관가로 사용될 집을 짓고 다음해 안흥진 첨사 조진달의 재임 기간인 1844년에 잔치를 열어 사방의 손님을 맞이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한시는 '黃麥打麥羊 出家家'(집집마다 찰보리를 타작해 거두어 가다) 인데 내용은 '군포를 내라는 조칙이 있는데도, 갑자기 지난밤 보리를 보내어 왔구나'(布詔行令曾如此 忽然昨夜麥秋至)라는 문장이 있다. 수군을 관리하기 위해 군포나 곡식을 거두어 관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흥진 수군의 중요 임무 중 하나였던 조운선의 안흥량 통과를 위한 호송과정에서 발생한 인명의 희생과 이를 비유한 한시도 있다.

이 시는 당나라 시인 왕유(699~759)의 오언절구 한시 '조명간'(鳥鳴澗, 새가 시냇가에서 울다)의 형식을 빌려 능숙한 초서체로 '사람이 계수나무꽃 떨어지듯 하여, 밤은 깊은데 춘산도 적막하다'(人間桂花落 夜靜春山空)고 했다. 수많은 인명이 안흥량 앞바다에 빠져 희생된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안흥량을 왕래하는 선박 중 뒤집혀 침몰하는 것이 10척 가운데 7~8척에 이르고, 1년에 침몰하는 것이 적어도 20척 이하로 내려가지 않고, 바람을 만나 사고가 많으면 40~50척에 이른다(1667년인 현종 8년 윤 4월조)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사고가 많은 해역의 특성으로 수군과 조운선을 관리하는 고가에서는 '無量壽閣'(영원한 생명을 기원하는 건물)'이라는 문구도 발견됐다.

문화재연구소는 수군진 유물 발견을 계기로 민간에 전승된 안흥진 수군과 관련한 문집과 문학작품을 찾아 번역할 예정이다.

관련된 주요 문집으로는 김득신(1604~1684)의 <백곡집>, 김규오(1729~1791)의 <최와집>, 이상적(1804~1865)의 <은송당집> 등이다. 

문화재연구소는 오는 24일 오후 1시 태안해양유물전시관에서 개최하는 '제2회 태안 안흥진의 역사와 안흥진성' 학술대회에서 해당 유물들을 공개할 예정이다.

태안 신진도 고가 인근 초등학교 주변은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조선시대의 건물로 추정되는 전통 기와집이 다수 남아있었다고 한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해당 지역이 수군진과 관계되는 관리와 수군이 거주했던 지역으로 판단돼 종합적인 학술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고 추가조사를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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