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프 초대석] '금속유물 권위자'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이한상 교수
[세이프 초대석] '금속유물 권위자'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이한상 교수
  • 글·사진 강재혁 기자
  • 승인 2020.07.14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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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많은 우리나라 '사설기관' 너무 많아
정부 생계걱정없이 연구하는 문화조성 시급
코로나19 '주춤' 발굴현장 '취업의 장' 넓어
▲ 세이프타임즈가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이한상 교수를 만나 고고학에 대한 식견을 들었다. ⓒ 강재혁 기자
▲ 세이프타임즈가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이한상 교수를 만나 고고학에 대한 식견을 들었다. ⓒ 강재혁 기자

우리나라에는 유적지와 유물들이 많다. 발굴과 연구를 통해 유물속에 잠든 역사적 사실을 밝혀 내는 것은 고고학자의 몫이다. 그들이 역사에 숨결을 불어 넣고 있다.

충남 공주시가 백제역사지구 보전관리사업을 추진 중인 사적 가운데 하나인 정지산 유적을 발굴하고 주관한 학자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출신으로 고대 금속유물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이한상 교수.

이 교수는 '가야사 공간적 범위, 한국고대사 산책' 등 많은 저서를 출간하며 활발한 연구활동도 하고 있다. 일본 규슈 출토 백제양식 금공품 연구, 연기 나성리 4호묘 대금구의 용문복원과 예찰 등의 논문도 발표했다.

최근에는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주관하는 '가야인의 기술' 학술 심포지엄에서 가야 장신구의 제작 기술을 발표했다.

세이프타임즈가 14일 이한상 교수를 연구실에서 만났다.

- 고고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현재부터 과거까지 사람들의 흔적을 가지고 연구한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기록을 가지고 공부한다. 그런데 그 기록도 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론과 역사책도 마찬가지로 그 안에 필자의 인식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고고학 자료라는 것은 옛날 사람들이 남긴 집터, 무덤, 물건 같은 것인데 그것들은 인식이 들어 있지 않다.

고고학 자료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처럼 아주 오래된 것은 있는 그대로 있을 뿐이다. 고고학자들이 보고 형태적으로 분석하고 혹시나 기록이 있으면 그것도 같이 분석한다. 어떤 의미가 있었고,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집을 지었고 어떤 도구를 썼었는지 분석한다. 기본적인 고고학 연구에서 한 층 더해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하는 것을 연구한다.

최근에 개기일식이 있었다. 당시 선사시대 사람들은 그 현상을 엄청난 '재앙'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것처럼 선사시대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자연현상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인간으로서는 전혀 극복 할 수 없는 일들이 굉장히 많았을 거다. 그러다 보니 절대자를 찾기도 하고 자연에 순응하기도 하고 그로 인해 제사의식이라던가 의례들이 많이 생겨났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연구하는 고고학자들도 많이 있다. 고고학이란 과거에 사람들이 남겼던 물질적인 흔적과 자료를 가지고 지금은 없어져 버렸지만 당시 사람들의 삶이라는지 또는 생각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 고고학을 연구하게 된 배경은

"1984년 부산대에 다닐때다. 부산은 일본과 가까워 일본 학자들이 자주 오기도 하고 그러한 분들을 볼 기회도 있었다.

어린 마음에 '임나일본부'라는 설이 궁금했다.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학설이다. 그것을 한국 사람이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있었다. 당시에 샀던 책을 지금 보면 학술적인 책이 아니고 그냥 대중적인 잡지 같았다.

책을 보면서 '나도 가야 역사를 연구해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친구 두명이 2학년 때부터 고고학 공부를 했다. 당시 부산대는 박물관에서 주로 가야 유적들을 많이 발굴했다. 친구들이 그곳에서 발굴을 하면서 호기심이 더 생겼다.

처음에는 친구들을 보러 갔다가 1987년 4학년 때 현장에 따라갔다. 합천댐 수몰지구였다. 가야의 영토였지만 신라가 그곳을 흡수한 시기에 생성된 고분군을 발굴했다.

길이 좋지 않아 보급품이 잘 조달되지 않았다. 빈집을 얻어 경남 지역 대학들이 밥을 해먹으면서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경험을 통해 고고학의 매력에 빠지기 시작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본격적인 발굴을 하게 됐다.

기억에 남는 발굴지들을 뽑자면 대성동 고분, 울산 검단리 청동기 시대 환호 유적이다. 환호는 마을 주변에 둥글게 도랑을 판 방어시설이다. 이같은 발굴을 하면서 본격적인 고고학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 고고학자는 어떤 과정을 거치나

"고고학도 하나의 학문이다. 모든 학문에는 교과서가 있다. 고고학도 교과서가 있지만 현장학습이 가장 중요하다. 고대사를 전공하면 논문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흥왕 순수비와 같은 비석들을 가서 보면 그 지형에 비석이 있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렇게 감각을 살려 공부하는 것처럼 고고학도 직접 발굴하지 않으면 보고서나 서적을 잘 이해할 수가 없다.

때문에 가능하면 발굴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가장 좋다. 올해는 코로나19로 발굴을 거의 안하지만 예년처럼 아주 덥거나 춥지만 않으면 진행한다. 1980년대는 꽃삽이나 호미 등을 이용해 땅을 팠다. 유물을 일일이 사진을 촬영하고 좌표와 높이를 기록했다. 요즘은 디지털 카메라에 GPS기능이 있어 그림과 위치를 남겨 책을 만들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참고해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현장에 가는 것이지만 불가능하기 때문에 최대한 데이터들을 모아 책으로 전해줘야 된다. 따라서 기초적인 공부와 지식이 필요하게 된다."

- 가장 기억에 남는 발굴지는

"1996년 공주박물관에서 근무할 때다. 무령왕릉과 공산성에 멀지 않은 곳에 도로공사가 예정돼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행정절차는 중요한 유적지에 공사를 하게 되면 그 주위에 조사를 하게 돼 있었다. 직원들이 현장에 가봤더니 기와 조각이 나와 발굴을 하게 됐다. 당시 기회가 돼 발굴을 주관하게 됐다. 2월부터 그 해 12월 말까지 발굴을 했다. 산꼭대기 임에도 불구하고 시설물의 흔적들이 발굴됐다.

그 시대는 기와건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주로 큰 절이나 궁궐 정도인데 그곳에 웅진백제의 고급 기와 조각이 발견됐다. 다시 1년간 발굴을 하니 꼭대기에 인위적인 평탄화 작업을 한 흔적이 있었다. 그곳에 건물들과 얼음을 보관하던 빙고 등 새로운 것들이 계속해서 발견됐다.

발굴이 끝날 때 쯤 무령왕의 지석을 살펴봤다. 무령왕과 왕비를 같이 합장해서 묻었고 그 땅을 토지의 신에게 돈을 주어 샀다는 매지권이 적혀 있었다. 왕비의 지석에는 526년 11월에 사망했고 유지에 장례를 지냈다고 적혀 있었다. 호기심이 많아 공산성과 무령왕릉에 선을 그었고 거기서 25도 정도 틀었더니 그 선이 정지산을 정확이 지나갔다.

지석에 적혀있는 거상유지가 장례후 바로 매장하지 않고 27개월 동안 장례를 하고 묘에 묻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의 사료에도 나오지 않는 백제적인 독창적인 장례풍습이다.

'서쪽의 땅이 어디인가'를 알기 위해 그곳에서 나온 유적들을 고고학 증거와 지석의 기록을 비교해 보니 특별한 내용이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왕이나 귀족들이 사용할 수 있는 기와와 무령왕릉에 쓰인 동일한 벽돌, 등잔과 각지의 토기들이 출토됐다. 당시 각지 사람들이 토기와 음식을 바치는 조문의례와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기도 많이 나왔다. 왕릉이나 부여 쪽에 출토된 장고형 그릇 받침과 같은 제사 유물이 많이 나왔다. 결론적으로 궁궐과 멀지 않은 공간에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울타리도 만들어 놓았다. 평탄화 작업과 건물의 흔적과 방향과 여러 가지 요소들을 종합한 결과 이것이 무령왕비의 빈소라는 학설을 냈다.

아직도 여러 학자들이 '영빈관으로 쓰였다. 군사 요충지로 쓰였다'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 가장 보람 느꼈던 일은

"늘 발굴을 하다보면 우리가 몰랐던 정보들을 많이 얻게 된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아직도 미공개 된 것들이 많다. 그런 유물들을 정리해서 학계에 공개하기도 한다.

경주박물관 시절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금관이나 귀금속을 한 곳에 모아 전시하는 일도 있었다. 보통 몇몇 유물은 쇼 케이스에 있거나 창고에 보관돼 있다. 전시를 통해 모든 유물의 원색 사진을 찍어 공개했다. 후에 많은 연구가 지속 되었고 그것에 보람을 느꼈다."

- 한국 고고학계의 문제점은 

"많은 고고학자들이 근무하는 곳이 문화재 조사 연구기관이다. 150개 이상 되는데 모두가 사설이다. 그렇다보니 안정적이지 않다.

일본이나 중국은 공무원이 대부분의 발굴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 그런 시도를 할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학자들이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공적인 기관에서 연구했으면 좋겠다. 올해부터 문화재청이 대학과 공동발굴을 하고 있다. 경주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와 경주 문화재연구소가 공동발굴을 하고 있다.

우리 학교도 참여하겠다고 고고학계에 연락을 했다. 우리는 충남대와 연합해 고고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을 보낼 계획이다."

- 고고학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과거에 비해 고고학이 인기가 없다. 얼핏 보면 힘든 일처럼 보이고 춥거나, 더운 데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내연구를 할 수 없겠냐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다. 젊은 시절 현장 체험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일자리가 없다고 생각 할 수 있다. 하지만 문화재 발굴 수요는 늘고 있다. 여러 공사로 발굴을 많이 해 취업의 장은 넓다.

꿈을 갖고 열심히 공부한다면 누구나 훌륭한 연구자가 될 수 있다. 젊은 고고학자들은 자신이 발굴했던 유적이나 유물을 중심으로 아주 깊게 연구한다.

새로운 발굴을 통해 자료는 항상 나오고 있다. 한번 발굴했다고 모든 것을 다 밝혀 낼 수는 없다. 앞으로도 계속 연구와 발굴을 지속적으로 한다면 새로운 유적과 유물을 계속 찾아낼 수 있다."

■ 이한상 교수 △부산대 사학과(1991) △서울대 국사학과 문학석사(1995) △일본 후쿠오카대 인문과학연구과 문학박사(2006) △서울대 국사학과 문학박사(2009)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동양대 문화재발굴보존학과 교수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경북도 문화재 전문위원 △문화재청 문화재 전문위원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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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020-07-17 13:13:13
150곳이 다 사설기관이었다니.. 정부가 학자들이 안정적인곳에서 연구할수있도록 지원좀 해주세요.

tidls0625 2020-07-14 17:23:16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고학에 관심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제노비아 2020-07-14 17:13:14
지루할수있는고고학의 매력을잘설명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역쉬
세이프타임즈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