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돗 편지] 사색의 감옥에서
[아나돗 편지] 사색의 감옥에서
  • 정이신 논설위원
  • 승인 2020.06.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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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가 운영하는 대안학교에서 재생(齋生)을 가르치기 위해 늘 책상 앞에서 뭔가를 해야 합니다. 대안학교라고 해서 가르치는 것이 모두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재생이 처한 입시 현실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도 같이 알려줘야 합니다. 몇 십 년 후에나 이뤄질 일을 수년 내에 곧 이뤄질 것이라고 과장하면서, 한국 사회에 만연한 모순을 깨부수는데 앞장서 달라고 재생에게 요청하는 교육을 저희는 하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사회를 향해 책 읽기와 문해력의 중요성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재생이 처한 입시 현실은 쉽게 바꿔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학입시는 여전히 문제를 풀어내는 기술과 암기력을 더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거나 공부를 더하기 위해 유학을 가면 전혀 다른 현실이 재생 앞에 놓입니다.

공부란 인간이 평생을 두고 진전을 거듭해야 하는 과업이고, 비문자로 된 다양한 텍스트까지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일부 학생은 평생 동안 해야 할 공부를 고등학교 때까지 모두 다 하고 말겠다는 식으로 매달립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중요한 공부를 해야 하는 대학에 가거나 유학을 가면 그전까지 배운 학습방법과 잘 연계되지 않는 수업 현장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습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실력은 종합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얼마나 갖췄는지,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이를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지를 반드시 따집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까지 우수학생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공부했던 재생 중에는 이런 면을 소홀히 했던 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까지는 갔으나, 사회에서 요구하는 실력을 갖추지 못해 헤맸습니다. 반대로 대학의 문을 닫는 순위로 간신히 입학했는데, 들어가자마자 장학생이 된 이도 있습니다.

북향민의 경우 남한 학생과 조금 다른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북한에서는 자신이 그렇게 열등한 학생이 아니었는데, 교수가 자신이 북향민이라고 차별하는 것 아니냐'고 왜곡된 시선으로 항의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처한 문화충격의 실상을 넘어선 실력을 갖추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차별이라고 의심부터 하는 재생이 간혹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다양한 방법을 찾다 보니 책상 위가 뭔가로 어지럽게 늘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책상이 저에게는 사색의 감옥이 돼 버렸습니다. 이곳에 너무 오래 갇혀 있다 보니 허리 근육마저도 약해져서 물리치료와 침 시술을 몇 번 받았습니다. 더 심한 문제는 노안입니다. 노안이 오자 원고를 수정하는 일이 꽤 번거로워졌습니다.

사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와 같은 류(類)의 거대담론을 저는 정확히 잘 모릅니다. 다만 제가 하나님 안에서 본 구원의 기쁨이 좋아서, 지금과 달라질 한반도의 미래가 가져다줄 기쁨을 같이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갇혀 지냅니다. 또 북향민 재생을 통해 본 희망을 같이 나누고 싶어서, 이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좋아서 이렇게 갇혀 삽니다.

저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은 바위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저를 변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에게 주어진 변화는 바위를 옮겼기 때문이 아니라 바위를 제가 가진 힘으로 끊임없이 밀어댔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때로 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로 바위가 옮겨진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옮겨지지 않는 바위를 미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재생에게 바위를 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뭔지 알려줍니다.

사색의 감옥에도 불청객인 미혹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평범한 선생은 이야기하고 괜찮은 선생은 설명하며 뛰어난 선생은 제자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는데, 이와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라고 비수를 감춘 채 예수님의 옷으로 위장한 유혹까지도 불쑥 찾아옵니다. 그러나 뿌리 없는 지푸라기로 사람을 전락시키는 미혹과 유혹은 감옥에서도 버려야 할 혹(掝: 어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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