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설(陰陽說)에 따르면 우주를 비롯한 삼라만상은 서로 대립되고 상반되는 속성을 가진 두개의 측면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음과 양의 대립과 어우러짐으로 인해 사물이 생겨나고 변화하며 발전합니다. 음과 양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물로는 땅과 하늘, 물(水)과 불(火), 달과 태양 등이 있습니다.

물과 불은 대립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음양설에 따르면 이 둘은 서로 의존하고 통일돼 있으면서, 서로를 흥하게 하거나 망하게 합니다. 음양설에 따르면 음과 양은 서로 전화(轉化)하는 존재입니다.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시간과 장소,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데 둘 사이에 뚜렷하게 확정된 경계도 없습니다.

태극기 가운데 있는 태극문양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양쪽 꼬리가 올라가 있는 태극문양에서 양은 음의 영역에, 음은 양의 영역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는 음이 양에, 양이 음에 서로 포함돼 있다는 뜻으로 빛과 어둠, 선과 악의 분립이 비교적 명확한 서구의 사고방식과 많이 다릅니다. 음양설은 오행설(五行說)을 만나 음양오행설로 발전했습니다. 서로 독립돼 있다가 기원전 4세기 초인 중국의 전국시대쯤에 두 관점이 하나의 정합적 이론으로 통합됐습니다. 이후 동양인들은 이것을 여러 가지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틀로 사용했습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이 해석의 틀은 현대의 우리를 치료하는 한의학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예전에만 있었던 이론이 아니라 오늘날도 여전히 건재한, 만물의 운용에 대한 설명법입니다. 다만 누가 이 둘을 결합시켰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이 둘의 결합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음양설로 보면 종교는 달을 토대로 하는 음의 세계를 주로 다루기에 기본 토대를 음에 둡니다. 종교는 육신의 죽음 이후에 펼쳐질 삶을 생각하게 해야 하고, 죽은 이들을 어루만져야 합니다. 중동에서 발생한 종교가 양의 종교라고 보는 이도 있지만, 기독교는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음의 세계까지 껴안았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음의 세계가 지닌 슬픔과 고통을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음양의 존재가 아니고, 음양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종교, 경제의 중심지이자 양의 대변자였던 예루살렘에 있지 않고, 갈릴리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부활해서 완전히 음양을 초월한 존재가 된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입장에서 보면 늘 말썽만 일으키는 쌍놈들의 도시이자 음의 도시인 갈릴리로 직접 가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구원을 약속 받은 양의 존재가 됐다 하더라도, 음의 존재를 살피며 살아야 합니다. 양의 혜택을 누리며 양이 주관하는 세계에서만 살지 말고, 다시 어둡고 습한 음의 존재들과 어울려 살면서 그들에게 거룩함을 전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겠다고 하신 뜻이기에 그것을 헤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구원을 약속받은 후 자신은 양이 됐다고, 양의 존재로만 살아가겠다고 하는 순간부터 추락이 시작됩니다. 양의 세력이 가진 혜택만을 우선적으로 대변하려는 순간부터 그는 사이비ㆍ이단의 교주들과 별 다를 게 없는 사람이 돼 버립니다. 그가 스스로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지만, 그는 그분의 제자가 아닌 삯꾼 목자나 가짜 제자와 동격이 됩니다.

예전에 진도 팽목항에서 드렸던 부활절 예배를 두고 '우상숭배'라고 폄하했던 어떤 목사의 천박한 언행 때문에 한국 교계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언쟁이 오갔던 적이 있습니다. 이는 그 목사가 성경에서 말한 신앙의 뿌리경험을 오해했기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뿌리를 살필 줄 모르는 종교가 오래 유지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양이 주는 혜택만을 따라 움직이거나, 자신의 행적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추앙해 주기를 바라고 살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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