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돗 편지] 밥사와 감사
[아나돗 편지] 밥사와 감사
  • 정이신 논설위원
  • 승인 2020.03.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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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돗학교에는 석·박사보다 더 높은 학위인 '밥사'가 있습니다. 거칠고 때론 까칠한 세상에서 내가 먼저 따뜻한 밥 한 끼를 상대와 같이 나누는 것이 석·박사보다 더 나은 것이기에 아나돗학교에서는 밥사를 그들보다 높게 대우합니다.

학교 밖에는 밥사와 동급의 학위인 '술사'가 있습니다. 친구가 외로움에 술을 마시고 싶어 할 때 같이 술잔을 기울이는 이가 술사입니다. 그런데 술사는 저희의 교육철학과 맞지 않아 학위과정을 개설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아니어도 세상에서 술사 학위를 주는 곳이 많기에 저희는 이 교육과정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밥사보다 높은 교육과정으로 '감사'가 있습니다. 항상 자신의 삶을 고마워 할 줄 알며, 타인과 더불어 나누며 사는 것이 최고로 멋진 삶의 모습이라고 가르치고 있기에, 밥사 위에 감사 학위과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 교육과정이 변신을 꾀하고 있습니다. 밥사를 자처했던 이들이 결혼했고, 아이까지 생겼기에 토요일에 올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전처럼 아나돗학교에서 밥을 해 먹이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과 같이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갑니다. 감사 또한 뒤늦은 깨달음으로 인해 새로운 교과목을 개설해야 하는 필요성이 대두됐습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어느 날 기도하며 하나님의 손 안에 계시는 아버지와 화해하고 매듭을 하나 풀었습니다. 저의 아버지 나이 54살인 196○년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때는 직장에서의 정년퇴임이 대부분 만 55살이었고, 만 60세인 회갑에는 마을에서 잔치를 했습니다. 그랬던 때에 아버지는 50살이 넘어서 저를 얻었고,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진짜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결혼식을 하기 위해 혼인신고를 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호적등본을 떼어 보니 저의 출생신고가 1969년 12월 31일로 돼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정부의 일방적인 조치로 양력설인 1월 1일부터 공무원은 대거 사흘을 쉬었고, 5월에 있는 제 생일과 너무 차이가 나기에 12월 31일에 출생신고를 할 리가 없었습니다.

1970년대로 저의 출생년도 자리수가 바뀌면 벌금을 내야 했기에, 아마도 벌금을 내지 않으려고 당시 동사무소의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날짜를 바꿨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는 출생신고를 1970년대에 했으면서도, 저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1969년에 했다고 해야 벌금을 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호적과 저의 실제 나이가 다릅니다. 어릴 적에 무수하게 들었던 저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의 퍼즐이 호적등본을 보니 그제야 비로소 맞춰졌습니다.

제 나이가 이미 50살을 넘겼습니다. 어느 날 새벽기도를 하고 난 후 문득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만약 지금의 저에게 핏덩이 같은 자식이 생긴다면 어떨까요? 특별한 피임법도 없었고, 아이가 생기면 그냥 낳았던 그 시절에 아버지는 저를 얻은 후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어릴 적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오던 날이면 아버지는 저를 당신의 머리맡에 놓아둔 칠판 앞으로 불러 숫자놀이를 시키셨습니다. "지금이 몇 년도이고 네가 몇 살이냐, 네가 대학까지 가서 졸업하면 몇 년도가 되고, 몇 살쯤 되냐, 그리고 내 나이는 몇 살쯤 되냐?" 분필을 들고 칠판에다 저에게 그것을 계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늘 장탄식과 함께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까"라는 아버지의 넋두리가 이어졌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덕분에 늦었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와 가까스로 화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1960년대, 54살에 저를 얻은 아버지가 했던 복잡한 생각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늦었지만 아버지와 화해했고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습니다.

뒤늦은 분노는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 낫지만 화해나 감사는 늦더라도 꼭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나돗학교에 개설한 감사 학위과정은 앞으로도 계속 빛을 발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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