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돗 편지] 몇 년 앞서가 보니
[아나돗 편지] 몇 년 앞서가 보니
  • 정이신 논설위원
  • 승인 2020.03.07 09:00
  • 댓글 1
  • +더보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이 쓴 책을 아나돗학교 학생들과 같이 읽고 있었는데, 어느 날 딸아이가 그가 쓴 다른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딸아이가 다 읽고 책꽂이에 꽃아놓은 책을 호기심에 집어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무슨 내용일까'라는 의문부호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책의 마지막 장에 제가 살았던 소도시의 모고등학교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제가 다녔던 그 고등학교를 재수해서 들어갔던 사람 이야기였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저는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를 재수해서 입학한 사람들을 한 단계 낮춰 보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 얼마나 공부를 안 했으면 고등학교를 떨어지냐'가 제가 그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가지고 있었던 치기(稚氣)였습니다.

책 소개에서 박○○은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를 재수해서 갔고, 대학교마저도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에서 좋은 대학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학교를 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사회적으로 저보다 뒤처졌다고 말하기 힘든 위치에 있습니다.

저는 오랜 방황을 통해 목사 및 대안학교 간사라는 위치에 가까스로 다다랐지만, 그는 저와 다른 사회적 궤적을 그리며 한국 사회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 돼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때의 치기라면 '고등학교를 재수해서 오느냐', '네가 간 그런 대학교도 학교냐'라고 놀렸을 터이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습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50년을 넘게 살아보니 삶에서 몇 년을 앞서가면 다 끝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저는 재수해서 그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이 아니니 고등학교 때는 제가 그보다 앞섰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제가 그보다 앞선 것일까요. 인생에서 몇 년 앞섰다고 우쭐대거나, 뒤처졌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좌절하면 안 됩니다. 이 세상에서 지냈던 육신의 삶이 끝났다고 해도 역사의 평가가 남아 있기에, 하나님 앞에 서기까지는 우리의 삶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북한에서 태어난 것과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이 다릅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그에게 주어진 안타까운 운명의 올무가 꽤 넓게 펼쳐진 채 태어나는 사람이 있고, 금수저를 손에 쥐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지 불안한 인간의 삶에서 스스로 한 선택에 100%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사고가 지구촌의 모든 상황을 완전히 꿰뚫어 볼 만큼 완벽한 것이 아니기에 모든 선택에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따라서 어떤 선택을 했든지 일단 선택한 후에는 그것을 남과 비교하지 말고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한 번의 선택으로 인해 몇 년 뒤지거나 앞설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무엇을 선택한 후에는 그것을 예쁘게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몇 년 더 앞서거나 뒤진 것은 이 과정에서 다시 순위가 바뀝니다.

책에 언급된 그도 그랬을 것입니다. 고등학교 입시를 두 번 치렀기에,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은 재수했다는 핑계로 동기들에게 '○○형'이라는 호칭을 들었지만, 졸업 후에는 같은 동기라고 반말을 하는 동창회에 참석했을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형이라는 호칭을 듣다가, 졸업 후에 동창회에 갔더니 서로 말을 놓고 존대어 없이 이야기하는 풍경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조금 궁금하기도 합니다.

허상이라면 깨부숴야 하지만, 실체라면 서로를 인정하고 대화해야 합니다. 인간의 선택으로 모든 것이 다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청소년기에 몇 년 앞서 갔다고 청년기와 장년기에도 계속 앞설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의 선택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어설프게 비교하며 안타까워하지 말고, 자신의 선택을 조금 더 아름답게 가꿔가 보십시오.

최선을 다한 후에 하는 성실한 선택은 그것만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정성을 다해 가꾼 그 선택은 훗날 당신을 평안의 길로 인도하는 길라잡이가 될 것입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유니파한 2020-03-07 09:28:25
감동적인 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