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후반인 남자가 90살이 넘은 여자에게 전화를 하더니 "엄마"라고 했습니다. 옆에 그의 손자로 보이는 아이들이 있었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엄마"라고 했습니다. 어머니 혹은 어머님도 아니었습니다. 나이가 얼마가 됐든지 그에게는 그냥 엄마였습니다.

그 장면이 꽤 낯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억하고 있었고 저는 잊고 있었습니다. 그와 제가 둘 다 누군가의 아들이었음을. 한 가정의 가장이자 어떤 이들의 아버지, 할아버지였지만 그도 역시 한 엄마에게는 아이였습니다. 엄마가 좋아 그냥 엄마라고 부르는 이 순박한 모자 사이에 다른 것이 끼어들 수 없었습니다.

그와 헤어진 후 낯익지 않았던 그 장면에서 바울이 생각났습니다. '아바, 아버지.' 바울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했습니다(로마서 8:15). 아바는 아람어로 어린아이들의 용어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나 아버님이 아닌 아빠라고, 자기의 아빠를 전적으로 의지하며 부르던 순백의 용어였습니다. 바울은 구약시대의 무섭고 두렵기만 했던 야훼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하나님을 먼저 그렇게 부르셨기에(마가복음 14:36) 가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바울의 용기도 대단한 것입니다.

바울의 글을 읽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제 안해도 저희 딸의 엄마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딸입니다. 제가 지금은 아빠이지만 그 이전에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제 안해 역시 그러했다는 생명의 순환 고리는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동안 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60대 남자의 입에서 나온 엄마라는 단어가 다시 생각나게 했습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구약성경에는 아버지의 훈계와 어머니의 가르침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잠언 1:8). 당시에 가르침의 주체는 주로 남자요,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어머니를 가르침의 주체로 아버지와 같이 언급했습니다. 솔로몬이 살았던 시대가 지금으로부터 3000여년 전입니다. 당시에 어머니의 가르침이 있었다고 해도 이것을 문서로 기록한 것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히브리어로 보면 더 깊은 속내가 드러납니다. 히브리어로 아버지의 훈계는 '무사르'이고, 어머니의 가르침은 '토라'입니다. 토라는 구약성경의 근간을 이룬 모세오경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잠언은 아버지의 훈계에는 토라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머니의 법'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잠언은 토라를 알려주는 주체로 엄마를 언급함으로써 엄마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중요 통로가 된다고 했습니다. 예언자와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될 줄 알았는데, 엄마를 통해서도 전달되니 엄마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입니까.

부모 공경의 윤리는 거의 모든 종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잠언이 기록될 당시에는 글을 쉽게 기록할 수 있는 종이가 없었고, 문자를 아는 사람도 매우 적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주로 특수계층을 통해 구전됐습니다. 글을 문서로 남기려면 많은 비용이 들어갔기에 먼저는 암송해서 구전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또 이런 이유로 고대 이스라엘의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상에서 전해주는 사람은 주로 부모였습니다. 성인이 돼 제사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주로 부모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한 부모 공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는 통로를 존경하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역사에 대한 책임은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개인이 지기에는 버거운 무게인지라 다양한 공동체를 만들어 그 무게를 서로 나눠집니다. 감당하기 힘든 짐을 같이 지기 위해서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 의지하며 걸어갑니다. 이 관계에서 아버님, 어머님보다 아빠와 엄마가 더 필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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