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프타임즈 칼럼] 기억이 남긴 그림자
[세이프타임즈 칼럼] 기억이 남긴 그림자
  • 정이신 논설위원
  • 승인 2020.01.18 09:3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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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자기가 좋아하는 빵이라고 동네 제과점에서 ○○빵을 사 왔습니다. 국립 예술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한국무용을 했기에 늘 다이어트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아이입니다. 왜 그 빵을 좋아하는지 물어봤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시험이나 공연을 위해 다이어트를 하면서, 배가 고프면 같은 반 여자아이들 20여 명이 비교적 큰 그 빵을 하나 사서 돌아가면서 한 입씩 베어 먹었다고 했습니다. 무용반에 있는 남자 둘은 제쳐놓고 자기들끼리 다이어트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그 빵을 먹었는데, 자기는 지금도 그 빵이 맛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빵에 얽힌 기억이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가장 싫어하는 빵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고, 이후 고등학교까지 고향에서 다닌 후 저는 간신히 경기도 모처에 있는 형님 집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녔습니다. 그때 제가 처한 상황이 그러했기에 시골에서 보내주는 향토 장학금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홀어머님이 보내주시는 귀한 돈인데 배가 고파도 돈이 적었습니다. 그래서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주로 시장에 가서 순대를 사 먹었습니다. 서울에서 경기도 모처에 있는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너무 늦어 가게가 문을 닫았을 때는 제과점을 찾아갔습니다. 밤늦게 제과점에 가면 하루를 정리하면서 ○○빵을 싸게 팔았습니다. 1980년대 후반 그 빵은 천 원이었고, 저는 그 빵을 사서 반으로 쪼개 저녁과 그 다음날 아침 두 끼를 해결했었습니다.

딸아이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딸아이와 저의 ○○빵에 대한 이해가 다른 것은 단순히 세대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동일한 사물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제가 경험했던 기억에 갇혀 다른 이들이 기쁘게 받아들이는 현실을 저는 슬프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딸아이에게는 맛있는 빵인데, 저에게만 맛없고 슬픈 빵이었던 것은 저의 해석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빵을 두고 서로 이해가 갈리는 현실에서, 개인적인 기억에 함몰돼 있었기에 저는 ○○빵이라는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개인적인 아픔으로 휘어져 있는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에게 좋은 것만을 끝까지 기억합니다. 그래야 우울증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기에 뇌(腦)에서 자동적으로 나쁜 기억을 먼저 지웁니다. 이와 달리 저는 나쁜 기억 속에 갇혀 있는 아름다운 현실을 끄집어내야 합니다. 그것에게 '더 이상 갇혀 있지 마라'고 자유를 줘야 합니다.

제가 작별을 고해야 하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정의를 찾아 학생운동권을 탐색하면서도 하나님을 인정해야 했던 시절 저에게 최종적으로 남았던 것은 신적(神的) 가치였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그분이 바라시는 것이 제 삶의 최고 가치가 돼야 했기에, 그것을 위해 매진하는 것이 제가 가야 하는 길이 됐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수도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방법을 제대로 알 수 없었기에 전전긍긍하며 찾았던 것이 개신교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찾아보기 힘든 개신교 수도원을 1980년대에 손쉽게 찾을 수 있었겠습니까? 머뭇거리던 사이에 시간이 흘러 군대를 갔고, 병장 때 저를 면회 왔던 안해를 만났습니다. 목사가 수도자인지 생활인인지 정의 내리기 힘들어 생활 수도자라고 거창하게 이름 지었지만,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이 저를 늘 따라다닙니다. 이제 이것과도 이별하려고 합니다.

정의(실현)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그분에 대한 기대가 주요 구성요소입니다. 이 기대를 가지고 맘몬(mammon)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위력 위에서 서핑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습니다. 아픔과 방황의 프리즘으로 가둬뒀던 기억을 이제 풀어 주려 합니다. 맛있는 빵과 아름다운 시간을 더 이상 슬픔으로만 보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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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만이 2020-01-19 09:25:24
옛날에는 다어려웠던시절 꽁보리밥만 잘먹었던 생각나네요

정이신 2020-01-18 11:23:55
슬픈 기억을 하나님의 은혜로 승화(昇華)시키지 않고 그대로 묵혀뒀습니다. 그랬더니 견딜 수 있는 옛기억의 그림자가 아니라, 현실을 굽은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나쁜 기억이 돼 버렸습니다. 에휴! ㅠㆍ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