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책(facebook)에서 어떤 목사가 써 놓은 글을 읽다가 '빵'하고 웃음보가 터진 적이 있습니다. 글쓴이에게서 촌철살인의 감각이 느껴져서 그 글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누가 나한테 '당신 진보지?'라고 묻는다. 그래서 '진보가 뭔지는 아냐?'고 되물었다. 잘 모르겠단다. 해서 내가 아주 짧게 잘 설명해 주었다. 있잖아∼! 보수는 강자의 책임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구, 진보는 약자의 권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야. 난 말이야 진보 겸 보수야. 넌 꼴통이구."

기독교인이 성경공부는 하지 않고 기도만 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항변하면 깊은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은 보수와 진보가 모두 인간 세상에 필요한 것이라고 하는데, 본인 스스로 어느 한쪽만을 택해 그것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라고 억지 주장을 펼치는 꼴통이 됩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타인과 공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감이란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위로와 함께, 비록 다르지만 더불어, 같은 시공간에 너 홀로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공감 능력을 확장하기 위해 늘 기도하고 성경공부를 해야 합니다(디모데전서 4:5). 이 둘 중에 하나에만 집중하다 보면, 자신만의 신념을 하나님이 주신 공감의 마지노선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더 커 보이고 사탄이 작아 보일 때까지 하는 기도가 진정한 공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능이 더 커 보이고 세상에서 많이 가진 사람들의 힘이 더 약해 보일 때까지 하는 기도가 충분한 기도입니다. 자신이 지닌 부족함보다 자신을 이끌어 가시는 성령님의 은혜가 더 자신의 삶에 차고 넘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때까지 하는 기도가 참된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를 하면서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은 참으로 웃기는 발상입니다. 세상사에서는 두 개의 가치가 때에 따라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면서 어느 한쪽을 악이라고 매도한 후 무작정 그들을 쥐어 패야 한다고 주장하는 꼴통은, 기도와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이뤄달라고 떼를 쓰는 사람입니다(야고보서 4:3).

길거리의 광고판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보다 자기 옆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묵묵히 감내해 준 사람의 투박한 손이 더 예쁘게 보이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유명 대학을 가지 못했어도 하나님과 부모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자식이 되고 싶다는 아이를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기도와 성경공부는 이런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이지, 특정인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이 둘을 통해 우리가 키워가야 하는 것이 열정입니다. 열정은 젊은 세대의 독점적 소유물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보편적인 가치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 젊었을 때보다 더 강하고 미치도록 아름다운 열정이 꼭 필요합니다. 특히 내가 살았던 시대의 환경보다 더 나은 환경을 우리의 아이들에게 물려주려는 열정이 꼭 필요합니다.

이런 열정이 욕심으로 바뀌면 안 되고 둘을 같은 것으로 취급해도 안 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고 기록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유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세대격차는 오늘날만이 아니라 고대에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뚫고 자기가 걸어 온 흔적까지 후세들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열정은 물려줘야 하지만 욕심까지 물려 줄 필요는 없습니다.

'역사의 교훈을 잊은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하는데 역사란 공동체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개인적인 가치를 지닌 욕심과 공동체적인 가치를 지닌 역사를 구분할 줄 아는 혜안(慧眼)이 아름답게 나이를 먹어가기 위해서, 타인과 공감하며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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