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는 것은 진짜 꿈이 아닙니다. 개꿈(犬夢)이라면 바뀔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꿈은 바뀌지도 않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일생(一生)을 걸고 그 꿈을 좇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젖히셨고 그분의 제자들은 평생 이 나라의 확장을 위해 헌신했으며, 공자(孔子)가 인(仁)과 군자의 꿈을 좇아서 중국을 떠돌았듯이 그렇게 끝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목표는 버릴 수도 있고 바뀔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벌고자 하는 돈의 양이나 가고자 하는 직장은 목표이지 꿈이 아니기에, 이것들은 버릴 수도 있고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이렇게 변환이나 교체가 안 됩니다. 어릴 때는 어린 꿈을 꾸고 크면 큰 꿈을 꾼다고 하면서, 꿈도 바뀐다고 말하는 것은 개꿈을 위한 변명일 뿐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아우르는 꿈은 변하지 않습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인인데, 제가 지금 다니고 있는 지상에 있는 교회는 목표이지 꿈이 아닙니다. 따라서 제가 위임목사로 있는 아나돗공동체의 꿈은 부활의 회복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 제가 세운 목표가 야훼 하나님이 주신 꿈과 대결을 벌이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의 목표는 꿈보다 먼저 자기를 따르라고 불한당같이 일방적으로 강요합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꿈은 실수(實數)를 토대로 꾸는 것이지 허수(虛數) 위에 짓는 것이 아닙니다. 허수 위에서는 꿈이 무너지고, 사이비ㆍ이단 교주들의 헛된 주장과 같은 망상만 늘어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제대로 된 꿈을 꾸기 위해서는, 목표에 근거를 둔 허수가 빠지고 현실을 기초로 한 실수가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꿈이 무엇인지 제대로 헤아리며 그것을 지킬 수 있습니다.

제가 얻으려는 부활로 이뤄지는 꿈에는 성공과 실패가 없습니다. 때로 저의 잘못된 선택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도 결국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저의 꿈을 따라가는 길에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그분의 인도하심만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인간이 꿈을 찾아가는 길에서 성공과 실패를 구분하는 것이 허수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목표에만 있습니다. 진정한 꿈에는 이런 것이 절대 없습니다.

발효시키기 위해 삭혀뒀던 꿈을 끄집어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언제 임하는지를 묻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나라가 어딘가는 있을 것이고, 따라서 그 나라는 때가 되면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앞으로는 어딘가 있을, 언젠가 임할 그 나라를 위해 제가 무엇을 할 것인가만 묻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길을 걷는 것이 한결 가뿐해집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기여하는 일인가, 그분을 찬양할 수 있고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일인가를 먼저 물었더니, 등에 짐을 지기가 한결 쉬워지고 가야 할 길이 더 강렬하고 뚜렷하게 보입니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판단을 해야 했지만, 매 순간 중요한 문제는 결국 하나였습니다. 두세 가지 문제가 다 중요한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몸으로 살아가는 차원이 아니라 머리로만 생각하고 있는 경우에는 달랐지만, 그게 아니라면 중요한 문제는 늘 하나였습니다. 문제가 두세 개라고 생각했던 일들도, 나중에 보면 뇌가 보낸 거짓 신호에 속아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거짓 신호에 속아 꿈과 목표를 바꾸지 마십시오.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여러분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꿈을 가졌고 그 꿈이 지정해 준 정의와 공의를 마음에 이식해, 여느 사람처럼 눈 감고 지낼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아졌습니까. 꿈은 공동체와 같이 나누며 누리는 것이기에, 내 꿈을 통해 공동체가 더불어 같이 비전을 볼 수 있어야 좋은 것입니다. 이런 꿈 하나 같이 장만해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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