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이 몸담고 있는 지상의 교회는 꿈이 아니고, 부활의 질서를 받아들여 신령한 몸을 입는 구원에 이르는 것이 이들의 진정한 꿈입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에 있는 무형의 교회로 가기 위해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좇아야 하고, 이것을 이루기 위해 망상을 뺀 찬송을 해야 합니다. 망상으로 부르는 노래는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몸을 가지고 살고 있기에 몸으로 수많은 판단을 합니다. 어떤 이는 인간이 뇌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뇌는 몸을 통해 들어오는 온갖 정보를 해석하는 곳입니다. 해석의 전제가 되는 종합정보는 인간의 몸을 통해 전달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몸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판단할 때 중요한 문제가 대부분 유기체인 몸으로 귀결됩니다. 이때 크리스천은 이 판단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라는 가치를 덧붙여야 합니다.

자신들도 크리스천이라고 주장하면서 성경을 벗어난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있는지, 언제 임하는지를 물었던 사이비ㆍ이단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잘못된 노력은 늘 허망한 결과를 낳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분이 정하신 때가 되면 임하는데, 그것을 허수로 헤아려 이상한 사회문제만 일으킵니다. 성경은 그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 보라고 했지, 그때를 거짓으로 헤아려 사람들을 속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할렐루야'라는 말은 '찬송하라'는 '할렐루'와 히브리어에서 야훼(하나님)를 뜻하는 단어 '야'가 합쳐진 말로, '야훼를 찬송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크리스천에게 아주 익숙한 말이기에 성경의 어디를 찾아도 쉽게 나오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구약성경의 <시편>에서 23번 나오고, 신약성경에서는 <요한계시록>에만 4번 나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할렐루야'를 '알렐루야'로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가 아닙니다. '알렐루야'보다 히브리어 '할렐루야'가 더 맞습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크리스천은 예배 때 찬송을 합니다. 자신들의 삶이 예수님을 알고 나서 변했음을 노래하고, 삶을 바꿀 수 있게 하신 그분의 은혜가 감사해서, 예배를 통해 그 나라의 기쁨이 자신들에게 다가 왔다고 찬송합니다. 이런 이들이 마지막으로 부를 찬송의 가사가 바로 할렐루야입니다. 즉, 크리스천은 마지막 날 할렐루야를 부르겠다는 꿈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에 부를, 경기의 후반전에 역전골을 넣고 '대∼한민국' 대신에 부를 '할렐루야'라는 찬송은 아무나 부를 수 있는 찬송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공의가 짓밟히는 일로 분노해 봤거나, 이 일로 인해 마음에 부담을 가져 본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만 부를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한 세력에 대한 심판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인간과 사회의 온전한 회복을 꿈꾸는 사람들만 부를 수 있습니다. 오직 성경을 푯대 삼아 사는 사람들, 남달리 하나님이 주신 꿈을 좇았다고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만 부를 수 있습니다. 저는 끝 날에 꼭 이 찬송을 부르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아니어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마지막 날에 부를 수 있는 노래는 하나쯤 지니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선한 양심에 따라 노래할 수 있는 일인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빌려 준 내일을 허비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 볼 수 있는 꿈을 가지십시오. 그 꿈이 없으면 마지막 날에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없어집니다.

인간에게는 절망 혹은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이제 끝'이라는 불변의 진실이 있습니다. 그리고 끝 날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끝 날에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끝을 얻기 위해 여러분도 끝 날의 노래를 발굴해 서로에게 이야기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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