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눈물'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스승인 예수님의 은혜를 깨달아 '그때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었구나'하고,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며 흘렸던 제자의 눈물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표현이 생각났던 것은 소설가 김영하가 쓴 책 읽는 이유를 밝힌 글을 읽으면서였습니다. 그는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갖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내면이 필요한 이유는 '대부분의 삶이 실패한 채로 끝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야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는 인간이 대부분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나만의 내면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김영하가 쓴 글을 읽고서 온 몸에 전율이 흘렀고,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글을 통해 제가 책을 읽게 된 계기를 되돌아 봤습니다. 대학교를 다니다가 휴학하고 군대를 갔었는데, 군대에서 고문관 취급을 받았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왕따를 경험하며 군 내무반에서 뒤처진 사람 취급을 당했습니다. 때로 선임사병들과 제가 속한 내무반의 안녕을 위해 다른 내무반의 보급품이나 기물을 '몰래 이동시켜야 하는' 군대문화는 저를 거의 미치광이가 될 지경으로 몰아갔습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었고 탈출구도 따로 없었습니다. 오직 신앙에 매달리며 군대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서 먼저 성경을 읽었습니다. 신입 졸병인 저에게 허락된 책이 성경뿐이었기에 성경을 먼저 읽었습니다. 성경 읽기를 통해 책 읽기에 맛을 들이게 됐고, 전역 후에도 줄기차게 책을 읽었습니다. 군대에서 맛들인 책 읽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탈영하지 않기 위해, 피동적으로 버텨내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성경만 읽었고, 계급이 올라가자 기회가 돼 군대에 배정된 진중문고를 읽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아주 귀한 선물을 가져다 줬습니다.

김영하의 글을 읽으며 군대시절과 베드로의 눈물이 겹쳐서 생각났습니다. 전역할 때 제 위로 선임사병이 두 명이나 내무반에 있었습니다. 대학생 병역특례 때문에 제가 그들보다 군대는 늦게 갔지만 전역은 먼저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다른 스트레스를 엄청 받으며 군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때 흔들리지 않는 내면을 갖춰 탈영으로까지 이르지 않도록 책 읽기로 저를 인도해 주신 이가 '보이지 않는 손길인 그분이셨구나'하는 것을 김영하의 글을 보면서 떠올리게 됐습니다.

김영하의 말처럼 대부분 우리의 삶은 실패한 채로 끝납니다. 승자독식주의가 드넓게 지배하는 현실에서 1등이 아닌 경우 모두 실패한 인생들인데 몇 명이나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2등에게 마저도 무엇이 잘 돌아가지 않는 사회구조에서 3등 밖의 등수로 살아온 저에게 무엇이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패자부활전이라 불리는 그분이 주신 소망이 있으니까요!

1등은 혼자입니다. 항상 우뚝 서 있고 모든 이들이 선망의 모델로 삼습니다. 그래서 외롭습니다. 2등부터는 1등이 아니기에 실패한 인생이지만, 1등이 아닌 많은 이들이 더불어 같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겠다고 나서기에 평범하지만 풍성하게 삶을 채울 수 있습니다. 1등에는 없는 패자가 된 공동체의 동지들이 2등에게는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합니다. 스스로 깨닫고 베드로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까지, 참고 기다리며 포옹해 줄 수 있는 1등이 아닌 이들을 위한 공동체가. 군 사병시절 부적응자였던 저를 껴안아 준 공동체가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 자유주의보다 소규모의 자율적 공동체를 더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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