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오십을 넘긴 후 '유(遊)', '놀이', '즐겁게 지내기'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 하위징아(Johan Huizinga)가 말한 호모 루덴스(Homo ludens)가 아니더라도 생(生)을 놀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면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쉰이 넘어가자 들기 시작했습니다. 놀이가 반드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가 반영되거나 선택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오십을 지천명(知天命), 천명을 아는 나이라고 했습니다. 공자가 말한 인간이 알아야 할 천명이 혹 놀이는 아닐까요? <遊>를 파자하면 '깃발(斿·깃발 유)'을 들고 쉬엄쉬엄 걷는 '辶(착)' 것입니다. 그럼 사람(子)에게 가야할 방향(方)과 인생의 길을 알려주는 것이 깃발이고(斿), 그 깃발을 따라 쉬엄쉬엄 걷는 것이 우리네 생이라는 놀이가 아닐까요?

십자가의 경우는 어떨까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인간의 구원 프로그램은 바뀌지 않고, 이 때문에 자기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도 바뀌지 않습니다(마태복음 10:38·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에게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를 무슨 수로 바꾸겠습니까? 예수님마저도 십자가를 물리치지 못하셨습니다. 아무리 기도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해도 십자가의 큰 흐름은 절대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개인적으로 겪어야 할 일들은 꼭 겪어야 합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하나님이 주신 길 앞에서 겸허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기도나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십자가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바꿀 수 있는 환경이라면 노력해서 과감하게 바꿔야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환경이라면 겸허하게 그런 환경을 주신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를 맞이하는 바른 자세이고, 자신의 생에 얽힌 십자가를 지는 올바른 방법입니다.

불가에서는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합니다만, 나이가 쉰을 넘기자 생이라는 십자가를 고난으로 '지고' 갈 지, 놀이로 '안고' 갈 지를 헤아려야 했습니다. 인생의 십자가를 고난으로만 지고 가면 우울증에 걸립니다. 십자가를 졌어도 예수님은 우울해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생을 고난뿐만 아니라 놀이로도 안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는 것을 안다면 굳이 우리의 생을 고난으로만 지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내 인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고칠 수 없는 것은 세월에 맡겨 두고 나머지를 선택해 안고 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고칠 수 없지만 이것을 받아들이는 놀이는 선택 가능한 것이기에 의지적으로 안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또 등에 진 십자가가 극에 달한 만큼, 팔로 안을 수 있는 부활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놀이의 시각으로 봤을 때 자신의 생에서 겪었던 일들, 시대가 자기에게 감내하라고 줘서 등에 진 고난이 많았다면 그만큼 자기가 안게 될 부활도 남과 다른 여러 가지 색을 지닐 것입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와 달리 쉰 살이 넘어가니 국어·영어·수학이 아니라 음악·미술·체육·독서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문단에 등단해 문필가가 되지 않더라도 소소한 글쓰기는 익혀둘 필요가 생겼습니다. 저처럼 이게 필요하신 분은 알아서 하나씩 배워 두십시오. 누구의 말처럼 운(運)을 여는 법도 되고, 인생을 놀이로 받아들이는 방법도 됩니다.

먼 거리가 아니어도 됩니다. 집 부근에 있는 조그마한 공원이나 가까운 도서관도 좋습니다. 펜을 들고 어디든지 인생을 안을 수 있는 놀이터가 있다면 한번쯤 과감하게 떠나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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