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식 소방장(오른쪽)이 강원도 월정사 119수학여행에서 학생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서울시
▲ 이성식 소방장(오른쪽)이 강원도 월정사 119수학여행에서 학생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서울시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꿈을 잃지 않고 소방관이 된 한 소방공무원의 이야기가 올해 초등학교 5학년 도덕교과서에 실려 화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서울시 중랑소방서에서 근무하는 있는 이성식(45) 소방장이다.

그의 부친은 6·25 전쟁 때 한쪽다리를 잃어 목발을 짚으며 생활한 장애인이었다. 어머니도 한쪽 눈은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으로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

야채·과일 노점상으로 생계를 이어오던 부친은 이성식 소방장이 21살 되던 해에 작고했다. 어머니는 홀로 노점상을 이어받아 장사를 해 오던 중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 소방장은 힘든 집안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 오전7시까지 청량리역 주변에서 신문배달을 했다. 그는 신문배달로 받은 2만원이 생계에 큰 도움이 됐다고 회고했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힘이 세지면서 리어카로 장롱, 책상 등 가구배달로 집안 생계에 보태야했다.

이성식 소방장은 "어려운 형편을 비관하지 않고 더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기 위해 소방관의 꿈을 갖게 됐다"고 전했다.

이 소방장은 2005년 서울시 소방공무원 채용시험에 합격 후 현재 중랑소방서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는 궁핍했던 어린 시절의 결심을 잊지 않고 몸이 불편 해 생활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 매월 정기적으로 기부도 하고 있다.

이성식 소방장은 "과거에 힘들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꿈을 향한 긍정의 힘이 오늘을 있게 했다"며 "저의 이야기를 통해 어린이들이 역경에 굴하지 않고 꿈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 질수 있다는 교훈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래는 교과서에 수록된 전문이다.

"역경이 없으면 개척 할 운명이 없다" 아저씨가 늘 마음에 품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마다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좌우명'이예요. 아저씨는 정말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났습니다. 아저씨의 아버지는 6·25 전쟁 통에 한쪽다리를 잃고 목발을 짚으며 생활하는 장애인(의족)이셨습니다. 어머니 역시 한쪽 눈이 안보이시는 시각장애인이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저씨가 성장을 해서 군 입대를 하게 되자 아버지는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돌아가셨고, 홀로 남은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시느라 비바람을 맞으며 노점상을 하시다가 그만 길거리에 뇌출혈(뇌 병변장애)로 쓰러져 지금은 가족의 도움 없이는 생활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됐습니다.

그렇게 두 분이 어렵게 야채, 과일 행상 등 노점상을 하시면서 가족을 챙기셨던 거예요. 아저씨 역시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라면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 3시간가량 서울 청량리역에서 신문을 배달하고 아침 7시쯤에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서 밥을 챙겨 먹고 세수하고 학교에 갔습니다.

당시 신문 200부를 배달하는데 한 달에 2만원(1부에 100원씩)을 받았어요. 그렇게 어린나이에 2년간 새벽신문배달을 하면서 서울 신답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초등학교 때 보다 힘이 세지면서 리어카로 장롱이나, 책상 등 가구배달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어요. 그래도 아저씨는 꿈을 잃지 않았어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뒤에서 많은 눈물도 흘리시는 엄마, 아빠가 너무나 불쌍해서 '나는 반드시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돼야지' 하고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아저씨가 어른이 되어 창피하지 않지만 아저씨도 당시 어린나이에 좀 창피하고 지금도 잊지 못하는 가슴 아픈 기억이 있어요. 아저씨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무렵 이예요. 서울로 전학 와서 처음으로 아저씨 아빠와 대중목욕탕에 갔는데 목욕탕에 아저씨 학교 친구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아저씨의 아빠는 한쪽다리밖에 없는 장애인이셨으니까 한쪽 다리로만 서서 샤워기를 잡고 머리를 감으시는 아저씨의 아빠가 너무나 창피 했던 거예요.

친구가 "너네 아빠야?"라고 물었을 때 아저씨는 그만 "아니야, 우리 아빠 아니야..."라고 하고 말았어요.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답니다.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하고 왜 엄마, 아빠는 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셨는지 운동회 날이면 부모님과 함께 하는 달리기 하는 친구들이 정말 부러웠어요.

하지만 불평, 불만을 갖기보다는 나중에 어른이 되면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돕고,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과 역경이 있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공부해서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소방관이 되고 싶었습니다.

아저씨는 2005년 드디어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룰 수 있었어요. 서울시 소방공무원 채용 시험에 당당히 합격한 겁니다.

지금은 위급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살려내고 교통사고나 각종 재난현장에서 고립되거나 뜨거운 화마 속에서 절실하고 애타게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화재현장, 그리고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구출했을 때 아저씨는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답니다.

지금도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운동도 하고 평상시에는 화재예방을 위해 캠페인활동은 물론 소방시설을 점검하고 수학여행 철이 되면 초등학교 소규모 테마 여행에 119동행하면서 우리 어린이들이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또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는 아저씨가 살고 있는 우리 마을을 위해 골목 이곳저곳을 깨끗하게 청소도하고 틈틈이 집에서 나오는 재활용 폐지, 박스 등을 모아 생활이 어려운 이웃할머니, 할아버지께 드리고, 작은 돈이지만 매달 정기적으로 몸이 불편한 아이들과 가정형편이 어렵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기부도 하고 있어요.

우리 주변에는 나보다 더 힘들고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이 있을 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자신의 꿈을 향해 노력한다면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저씨는 오늘도 소방관을 천직으로 여기며 모두가 대피하는 위험한 길을 되짚어 올라가며 망설임 없이 오늘의 운명에 맞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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