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아니지만 대안학교 운영 초기에 북향민을 가르치다가 이들에게 제가 제시한 역할모델(Role model)이 잘 먹혀 들어가지 않아서 고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할 지 기도하고 있었는데, 가르쳤던 학생의 아버지가 북한에서 남한의 특수목적고등학교(외고)에 해당하는 곳에서 교장을 지냈다고 했습니다. 곧바로 그 사람을 만나러 갔습니다.

"북향민 청소년과 청년들이 제가 말한 남한에서 갖춰야 할 삶의 모델을 잘 이해하지 못하니, 선생님이 이들에게 멘토가 돼 역할모델을 좀 설명해 주십시오."

정중하게 하기 힘들다는 대답이 들려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봉사나 나눔, 복지라는 말을 남한에 와서 처음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개념이 뭔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았지, 주도적으로 자기 인생 계획을 세워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북한에서야 교장까지 했지만, 남한에 온 북향민 아이들에게 뭘 가르쳐줘야 할 지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유태인 철학자로서 나치의 독일 수용소를 견뎌낸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타자(他者)란 나의 다른 모습이기에 자아(自我)와 타자를 구분하는 것은 플라톤(Platon)이 만들어 놓은 이데아(Idea)적 허상"이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타자는 숨겨진 자아의 일부이니 타자의 고통과 자아의 기쁨을 구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기쁨 나누기보다 앞서는 것이 고통을 나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아프리카의 빈곤과 한국의 부요를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개념입니다. 둘은 같은 지구인이고 한 영역을 구성하는 일부분일 뿐입니다.

가라타니고진(柄谷行人)은 "객관(客觀)이란 또 다른 의미의 주관(主觀)일 뿐 객관은 없다"고 했습니다. 북향민 제자들을 가르치다 보니 제가 어릴 적에 배웠던 북한괴뢰집단이라는 객관적 실체는 없었습니다. 내 민족의 반쪽이라는 상호주관적 실체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지도자들이 밉다고 중국에 북한을 넘겨줄 수는 없었습니다.

북한에서 썼던 것과 같은 말을 써도 북향민 제자들이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상황이 몇 차례 반복됐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쳤던 수많은 이야기들은 꿔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늘 제자들 주변만 맴돌았고, 이들의 삶에 기꺼이 끼어들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었습니다. 축척된 경험을 통해 북향민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정치적 통일보다 더 시급한 것이 인도주의에 입각한 문화적 교류이고 언어와 밥상의 통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몇 번의 뒤통수 맞기를 당하면서 배운 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눠 주는 것은 내가 주체가 돼 다른 이에게 나의 무엇을 주는 것이지만, 나누는 것은 식물의 떡잎이 둘이듯 처음부터 그의 몫이었는데, 그가 찾지 못하고 있던 그의 몫을 알려줘 그와 내가 자기의 몫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누는 것은 이런 사실을 깨달은 자유인(自遊人·스스로 거닐 수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러저러한 경험과 레비나스의 말을 들으면서 아나돗학교의 방향을 정리했습니다. 진정한 공존이란 '너희들끼리(북향민) 공동체를 만들어 잘 살아라'가 아니라, '너희가 만들어야 할 공동체를 만든 후, 너희가 내야 할 빛을 내어 너와 내가 서로 배우며, 같이 길을 가자'라고 하는 것이라고. 현재 이것이 아나돗학교의 활동 방향입니다.

거창하게 통일을 말하면서 하루아침에 북한이 남한처럼 변할 것이라는 환상을 접은 지 이미 오래됐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나누는 시간이 축척되면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신은 있습니다.

그 확신을 가지고 오늘도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나누러 갑니다. 우리들이 씨를 뿌려 놓으면 우리 후손들이라도 거두겠지요. 이것이 아나돗공동체가 본 비전입니다.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 한양대 전기공학과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독립교회 및 선교단체연합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아나돗학교 대표간사와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다. 독서와 글쓰기를 주제로 한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를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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