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1656, 캔버스에 유채, 318x276㎝, ⓒ 프라도 미술관
▲ 디에고 벨라스케스, 시녀들, 1656, 캔버스에 유채, 318x276㎝, ⓒ 프라도 미술관

흰 드레스를 입은 앙증맞은 금발의 공주에게 시선이 쏠린다. 도도한 표정으로 감상자를 단박에 사로잡은 주인공은 마르가리타 테레사 폰 합스브르크 공주. 스페인의 왕 펠리페 4세와 그의 조카이자 두 번째 부인 마리아나 왕비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이 어린 공주는 훗날 외삼촌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의 왕인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해 신성로마제국의 황후가 된다.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하라.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그대는 결혼을 하라.'

평화라는 이름의 혼인동맹을 통해 합스브르크 가문의 핏줄이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결혼을 했던 상대 가문의 대가 끊기면 자연스럽게 영토를 인수하며 전쟁없이 합스브르크 가문은 유럽의 땅주인이 된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대가가 따르기 마련. 순수혈통 유지를 위한 근친결혼으로 유전적 결함이 생긴 합스브르크 가문은 역설적이게도 그 결혼전략 때문에 대가 끊기는 비극을 맞는다.

저 귀여운 공주의 얼굴도 자라면서 점점 유전적 특이성으로 인해 이른 바 '합스브르크 턱'인 주걱턱으로 변해갔다.

벨라스케스는 사랑스러운 공주의 성장과정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애정을 담아 여러 점의 초상화를 그렸다.

▲ 결혼을 위해 빈에 정기적으로 보내진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들.
▲ 결혼을 위해 빈에 정기적으로 보내진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들.

마르가리타의 남동생 카를로스 2세는 누나가 태어난 지 한참 뒤에나 태어났기 때문에 오래도록 마르가리타는 펠리페 4세의 유일한 상속녀로 존재감이 무거웠다.

이런 상황은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스페인을 잃지 않기 위해 마르가리타를 외삼촌인 레오폴트 1세와 결혼시키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조카와 외삼촌과의 혼담은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운명 지어졌다. 어린 정혼자의 외모와 성장과정에 관심이 많았던 예비 시댁인 합스브르크 왕가는 공주의 초상화를 자주 요청하곤 했다. 당연히 이 막중한 임무는 수석 궁정화가였던 벨라스케스가 맡는다.

17세기 스페인 바로크 미술의 거장인 벨라스케스(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 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1599~1660)는 흥미롭게도 이 그림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 넣었다.

▲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부분
▲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부분

그림의 왼쪽에서 마르가리타 공주만큼이나 존재감을 뿜고 있다. 귀족적인 느낌이 들만큼 다소 거만한 자세다. 화가는 단순히 그림 그리는 장인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을 시각화하는 지적인 창조자라는 의식이 화가로서 그의 자존감을 한껏 치켜 올렸나 보다.

게다가 그의 가슴에 그려진 붉은 십자가는 달라진 그의 신분을 무심한 듯 슬쩍 흘리고 있다. 순수한 혈통의 귀족만이 가입할 수 있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표식이다.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래로 미술가의 위상이 현저히 높아졌고 그 자신도 펠리페 4세의 깊은 신임을 받는 수석 궁정화가였지만, 아무래도 그는 '진짜 귀족'이 되고 싶었던 게다.

출신 탓에 몇 번 탈락의 고배를 마시던 그는 국왕의 배려로 교황의 특별 허가까지 받아내며 기어이 그 꿈을 이뤄냈다. 저 붉은 표식은 이 그림이 완성된 후 몇 년이 지나 귀족 칭호를 얻게 된 뒤 나중에 첨가해서 그려 넣은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분제 사회에서 능력이 혈통의 발아래 있을 때 나타나는 씁쓸한 민낯이라 할 수 있겠다.

▲ 펠리페 4세 부부의 초상이 비춰진 거울 부분.
▲ 펠리페 4세 부부의 초상이 비춰진 거울 부분.

그리던 붓을 든 채 벨라스케스는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 걸까.

그림 밖 감상자인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걸까. 해답은 공주의 머리 뒤쪽 거울에 있다. 거울에 비춰진 왕과 왕비의 존재를 알아보는 순간 상황 판단 종료다. 사랑스러운 딸이 엄마와 아빠가 초상화 모델을 서고 있는 화가 아저씨의 방에 놀러온 것이다. 시끌시끌하게도 시녀들과 난쟁이, 어릿광대, 그리고 개까지 몰고서 말이다.

왼쪽의 시녀가 공주의 눈높이로 시선을 맞추며 작은 목소리로 무엇인가 권하고 있고, 어릿광대가 개를 발로 건드리며 부산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다. 마치 동영상의 한 장면을 캡쳐 한 듯 생동감이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의 제목을 의아해 한다. 아무리 봐도 공주가 주인공인 것 같은데 〈시녀들〉이라니.

사실 이 제목은 벨라스케스가 붙인 게 아니다. 17세기 왕실 소장 미술 작품 목록에는 그저 〈시녀들 및 여자 난쟁이와 함께 있는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로 적혀 있을 뿐. 애초에 〈펠리페 4세의 가족 초상화〉라 불렸고, 때로는 〈벨라스케스의 자화상〉, 〈펠리페 4세의 가족〉으로도 불렸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제작된 프라도 미술관 작품 목록집에 어느 기록자가 이 작품을 〈Las Meninas, 시녀들〉이라고 적시한 이후부터 제목으로 굳어졌다. 그림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두 명의 시녀가, 그것도 앞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별 뜻 없이 편의상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마르가리타는 결혼 6년 동안 네 명의 아이를 낳는다. 안타깝게도 자녀들 중 성인으로 성장하는 아이는 딸 마리아 안토니아 한 명밖에 없다. 양쪽 가문 모두 후계자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에 서둘러 아이를 더 낳아야 했다.

15살 어린 나이에 결혼해 네 번의 출산으로 이미 쇠약해진 상태에서 다섯 번째 임신을 했고, 결국 아이를 유산한 뒤 21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왕족의 여인으로 태어난 이상 후계를 잇기 위한 임신과 출산은 숙명이었을 터. 공주의 신분으로 태어나 신성로마제국의 황후가 되어 막강한 부와 권력을 누렸으나 그들도 나름의 아픔이 있었던 것이다.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충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한 뒤 동 대학원에서 미술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충북 단양군에서 교편을 잡은 뒤 미술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충북대학교 미술학과에 출강하며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현재 서울 성수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 세이프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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