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論語)를 책장에 두고 가끔 꺼내 읽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하는 일 때문에 '논어도 읽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그냥 좋은 책이기에 읽는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지혜는 아니더라도, 삶의 지혜가 담긴 책이니까 장식용으로만 둘 수 없어서 읽습니다.

노자, 장자, 맹자, 순자 등은 사람 이름이 곧 책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논어도 책 이름이 '공자'나 '공자어록'이 돼야 합니다. 그런데 유독 공자의 언행, 그분이 사람들과 나눴던 대화를 기록했다는 책 제목은 논어입니다. 책을 읽다보면 '공자가 그토록 많이 말씀했던 것이 인(仁)이니 책 제목을 논인(論仁)이라고 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성경을 자주 읽는데, 성경은 저에게 '그렇게 살면 되느냐'고 늘 질문을 던지고 때로 '잘 하고 있다'고 위로를 건넵니다. 논어도 성경처럼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저를 이끌고, 때로 위로를 줍니다. 나아가 스스로 제 삶의 길에 대해 주도적으로 질문하고 반성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제가 갖춰야 할 인의 덕목과 경계해야 할 비례(非禮)가 무엇인지 기도하게 만듭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논어의 첫 장을 열면 '學而時習之不亦說乎(학이시습지불역열호)'가 나옵니다. 첫 장부터 의문이 생깁니다. 왜 習而學(습이학)이 아니고 學而習(학이습)일까, 게다가 時習(시습)입니다. 때때로 익히라고 합니다. 이것은 '배운 것을 적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시로 반복하여 익힌다'라는 뜻입니다.

학(學)은 배워야 하는 것이고 습(習)은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학(배움)은 늘 열어놓고 끊임없이 하되, 그 중에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습(익힘)은 골라내야 합니다. 배운 것 중에서 골라내어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며 익혀야 합니다. 그래서 시습입니다. 그러고 보니 인생이 초반에는 배움에서부터 갈리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익힘으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선행학습이라는 유행어가 오래 전부터 나돌 정도로 학이 편만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학만 앞세웠을 뿐 덕(德)을 습하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논어는 학 못지않게 중요한 시습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학만큼 시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학을 많이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청소년들을 학원에만 많이 보내지 마십시오. 많이 배워도 배운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복습시간과 피드백(feedback) 과정이 없으면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좋은 선생에게 듣거나 책을 사서 읽으면 학은 이뤄집니다. 그러나 습은 반복 실천해서 몸으로 익혀야 합니다. 학과 달리 습은 될 때까지 무한히 지속적으로 반복해야 합니다. 사람의 생체 시계가 늘어나 평균수명이 늘어났어도 보통 3∼40대가 되면 학보다 습이 삶을 좌우합니다. 이 시기 이후부터는 학보다 습으로 펼쳐내는 생각과 행동이 삶의 결과를 만들어 갑니다.

학의 입장에서는 다독(多讀)과 다상량(多商量)이 좋지만, 시습의 논리로 보면 좋은 책을 반복해서 되새김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나돗학교 학생들에게 좋은 책을 요약하여 쓰면서 읽는 지독(遲讀)을 권합니다. 또 다상량보다는 적더라도 좋은 생각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밀고 나가 반드시 이뤄내라고 합니다.

몸과 생각을 바꾸는 시습은 관성의 법칙에 지배를 받습니다. 관성은 습관을 만들고, 습관은 잠재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내 몸이 가진 나쁜 언행을 바꾸기 위해서는 학뿐만 아니라 시습이 꼭 필요합니다. 논어를 통해 보면 삶의 질은 좋은 선생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그 선생의 제자인 내가 시습을 이루느냐 못 이루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저작권자 © 누구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언론 세이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