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 공자님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나이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습니다. 15세 지학(志學:志于學), 30세 이립(而立), 40세 불혹(不惑), 50세 지천명(知天命), 60세 이순(耳順), 70세 종심(從心·從心所欲不踰矩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제 나이가 지천명, 삶에 주어진 천명을 알아야 하는 시간을 넘겼습니다. 저는 불혹을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라고 봤던 공자님과 달리 '남을 거짓으로 혹(惑)하지 않아야 하는 시기'라고 정리했었습니다. 논어에 나온 말을 가져다가 마음대로 해석해 정리했다고 섭섭해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자님이 들었으면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하면서 빙긋이 웃으셨을 것 같습니다.

마흔이 넘어가면 거짓, 마네킹 비전(mannequin vision)으로 남을 속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불혹을 '남을 미혹(迷惑)하지 않아야 하는 나이'라고 정의했었습니다. 이제 지천명을 넘겼습니다. 논어를 배우며 지천명에서 천이 동양에서 말하던 자연천(自然天), 상제천(上帝天), 의리천(義理天) 중에 어느 것인지를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천명에서 천은 이 세개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지, 딱히 어느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50살을 넘겼으니 이 모든 것을 다 포함시켜 이해하며 살아야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고대 인도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라 오순(五旬) 이후를 해탈기(解脫期)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과 달리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천명을 '끝(종말)'이라고 다시 정의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천명을 안다는 것은 '종말을 의식하고 헤아리는 것'이 됐습니다. 대충 감이 잡혔습니다. 끝 앞에서마저 비굴하거나, 끝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삶이라는 경기를 마치 이제 갓 시작한 것처럼 행동하면 안 되는 나이가 오십이었습니다. 쉰 살이 돼서 정리를 시작해야 하는데 여전히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면 노추(老醜)가 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어릴 적에는 정해진 것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다녔던 대학교에서 마음에도 없었던 전공을 공부해야 했던 것이 모두 정보력 부족으로 인한 우연과 실패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제게는 인터넷도, 대학입시지도를 해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바로 거짓이었습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정해진 길도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돼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정해진 길이 내게 주어졌을 때는 과감하게 가던 길을 돌이켜야 합니다. 내게 정해진 길을 주신 인연과 하나님에 대해 겸허해져야 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에는 '만약(if)'이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해서 다른 길로 갔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줘야만 하는 길의 몫은 변하지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천명이 되고 난 후부터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하기보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또 알 수 없는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오순 이후를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회갑 이후로는 한 갑자를 넘겼으니 덤으로 주어진 생으로 생각하고 가급적 보이지 않게, 드러나지 않게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종심(從心所欲不踰矩)에 이를 수 있습니다. 지천명에 그 연습을 해 두지 않으면 이순이 아니라 역린(逆鱗)만 늘어납니다. 환갑 이후를 온통 역린의 비늘만 달고 살기에는 주어진 생이 너무 아깝습니다. 오십 이후로는 말의 무성함이 아니라 능력을 갖추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 정이신 논설실장·목사 = 한양대 전기공학과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독립교회 및 선교단체연합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아나돗학교 대표간사와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다. 독서와 글쓰기를 주제로 한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를 연재했다.

저작권자 © 누구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언론 세이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