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의 이슈분석 <21>

국내의 한 프로야구 팀이 훈련량을 대폭 줄이고 선수들을 푹 쉬게 했더니 오히려 경기결과가 좋았다고 한다. 강도 높은 훈련만이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믿었던 공식이 서서히 깨지고 있다. 그래서 휴식은 단순히 쉬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간혹 필자에게 예전 소방공무원 시절과 지금의 주한 미 공군 소방서를 비교해 볼 때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무엇인지를 묻는 사람들이 있다.

촌스럽게 급여나 복지에 관한 설명은 잠시 접어두고 굳이 따지자면 업무에 대한 창의적인 생각을 할 시간이 늘었다는 점과 20년 넘은 소방관조차 업무가 재미있다고 느낄 만큼 자기 주도적인 근무환경을 꼽을 수 있다.

미국 소방이란 곳이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과 임무에 충실하기만 하면 추가로 해야 할 일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편이다. 그렇다고 추가업무(Additional Duty)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요식행위나 불필요한 의전 등 업무 외적인 일이 대한민국 소방보다 상대적으로 적다는 얘기다.

필자가 소방공무원으로 재직했던 6년 동안은 수도 없이 많은 출동으로 분주한 시간을 보냈지만, 정작 골머리를 썩게 했던 주범은 바로 끊임없이 처리해야 하는 행정업무였다.

소방공무원들도 다양한 기관으로부터 행정사무감사라는 것을 받는다. 그래서 처리했던 업무에 대한 명확한 서류근거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행정업무는 정작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판단조차 흐리게 만들 소지가 있다.

자신의 일감을 줄이기 위해서 공무원들이 관할구역을 따지거나, 소위 “오지랖이 넓다”라는 감사관의 충고를 가장한 지적질을 피하기 위해서 도움의 손길을 멈춰야 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이렇게 앞뒤가 뒤바뀐 행태는 국민의 뜻과 고충을 이해하고 해결하는데도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행정사무감사라는 것도 국민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소방관들에게 주어지는 과도한 업무량이 곧바로 질 높은 소방서비스와 비례한다고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따라서 소방의 모든 정책과 시스템은 소방관들이 소방법 제1조를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여건을 최적화시키는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현장에서는 소방 본연의 임무보다는 곁가지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기만 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충분한 인력보강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주차단속이라던가 야간 방화 순찰이다. 출동과 병행해서 업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소방관들은 만성피로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계속해서 업무를 주고, 끊임없이 순찰을 돌리며, 누가 봐도 “일 하는 것 같다” 는 느낌만을 주려고 한다면 이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일이다.

거기에 국정감사라도 한 번 열리면 온갖 가공된 자료와 통계수치들이 책상을 가득 채우고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는 더이상 중요치 않고, 오로지 정해진 기일 내에 자료를 제출하는 것만이 능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휴식시간을 이용해서 소방관들이 신문을 보거나, 족구라도 할라치면 “공무원이 일하지 않는다”며 가차 없이 민원을 넣는 사람들도 있다 보니 그저 죽도록 일하는 것만이 감사와 민원을 피할 수 있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소방관들의 업무 특성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머릿속 기준에 맞추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시민이란 이름’ 혹은 ‘감사관이란 이름’의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소방관들에게는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창문 넘어 먼 하늘을 멍하니 바라본다거나, 소방서 건물 앞에 나와 객관적인 시각으로 소방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수시로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이 바로 소방관에게는 트라우마로부터 회복되는 시간이며,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각오를 다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소방내부에서 먼저 관행을 타파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해 왔던 일들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정리해 보자.

행정사무감사라는 것도 질 높은 소방서비스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보조적인 역할만을 해야 하며, ‘마녀사냥’식의 감사는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기가 어렵다.

아울러 소방관들이 출동 중이거나 임무를 수행하는 시간만 아니라면, 신문을 보고, 운동을 하고,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행위들이 더 이상 민원의 대상으로 등장하지 못하도록 소방관의 기를 살려줬으면 좋겠다.

소방관들이 더 크게 웃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며,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그들이 행복할 수 있으며, 그 행복이 바로 대한민국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다고 필자는 굳게 믿는다.

이건 세이프타임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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