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해외봉사상 외교부장관상 영예…29년 청춘 바쳐 봉사

"사랑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사랑하는 것이고, 봉사는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25일 개발원조의 날을 맞아 성남 코이카 본부에서 제10회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외교부장관상을 받은 유위숙(54) 수녀는 "저는 비정상이어서 대책이 없다"고 싱글벙글 웃으며 '사랑'과 '봉사'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내렸다.

수상을 위해 콜롬비아에서 잠시 귀국한 유 수녀는 인터뷰에 앞서 기자에게 부탁 먼저 했다.

그가 돌보는 행려자들이 "상 받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거냐"고 불안해하며 물어봤을 때 "한국에 크게 구걸하러 간다. 걱정하지 마라. 돌아온다"고 안심시키고 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번 시상식에서 상금이나 상품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빈손이어서 걱정"이라며 "현재 하는 일이 자꾸 커져 이번 방한 기간에 조금이라도 얻어가야 하니 기자님이 좀 도와달라"고 떼를 썼다.

"기사가 나가고 독지가의 도움이 있을 수 있다"고 하자 유 수녀는 처음에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더니 열심히 해외 봉사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제10회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외교부장관상을 받은 유위숙 수녀

대구 출신인 그는 대구교대를 졸업하고 경북 영덕군 남정초등학교에서 2년간 교사로 근무하다 사표를 내고 1986년 에콰도르로 선교를 떠났다.

유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세례(세례명 스콜라스티카)를 받았다. 집안의 반대를 피해 수업이 끝나면 몰래 교리를 배웠다.

"사춘기여서 그랬을 겁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유한하고 유효 기간이 있는데, 뭔가 영원한 것은 없을까를 고민했죠. 그때 친구가 성당에 데리고 갔어요. 눈과 귀가 열리는 느낌이었죠. 그곳에서 영원한 것이 있음을 알았던 겁니다. 바로 하느님을 만난 것입니다."

성당에 나가 교리 교사 등을 하면서 정말 열정적으로 활동한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많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해외 선교 활동을 꿈꿨다. 마침 에콰도르에서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이 왔고, 그는 평신도 신분으로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수도 키토에서 남쪽으로 13시간 자동차로 달려 만나는 가난한 어촌마을 본당에 짐을 풀었다. 첫 봉사 활동에 나선 것이다.

"우리 본당은 공소 11개를 담당했어요. 말씀의 전례를 비롯해 유치원 교사, 신용조합·진료소 운영 등 성당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닥치는 대로 다했죠. 밥 짓고, 빨래하고, 진료하고, 시골에 갔다 오다 자동차가 고장 나면 고쳐서 12시 넘어서 돌아오고, 물도 없어 강물을 먹으며 주민과 함께 동고동락했습니다. 양배추 잎을 따서 파는 마을인데, 한 포기를 팔기도 어려운 곳이었어요. 당근도 반씩 잘라서 판매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몹시 가난했답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영화에나 나옴 직한 그런 곳이었어요.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다른 평신도 선교사들과 일하던 그는 현지 주교가 '수녀회를 결성해 활동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자 수녀가 되기로 한다. 수녀 교육을 받고 1988년 수녀가 된 후 정식으로 인가를 받아 수녀회를 만들었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 어려움이 찾아왔다. 자신이 만든 수녀회를 떠나야만 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교회 내부의 일이라 자세한 설명은 피했지만, 그는 정들었던 에콰도르를 떠나야만 했다.

에콰도르 봉사 활동 당시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 잠시 공부하러 갔다가 만난 주교와의 인연으로, 그가 다음 행선지로 선택한 곳은 콜롬비아였다.

1997년 보고타에서 자동차로 12시간 정도 걸려서 도착하는 안티오키아 주 칼다스라는 소도시. 그곳의 광산촌에 다시 둥지를 틀었다. 칼다스는 커피 농사를 짓고 석탄을 캐는 가난한 마을.

"주교님이 처음 소개한 곳은 '어린이집'이었죠. 거리에서 구걸하는 여자아이들을 돌보며, 그들과 먹고 자는 일이었는데, 행복했어요. 완전히 부서진 가정의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지내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았답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이 우리의 성소라고 생각했죠."

예수회선교수녀회 소속인 그는 인터뷰 내내 힘든 봉사 여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행복하다"는 말을 접속사처럼 이어갔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갈 곳이 없게 되자 이번에는 수녀원 옆에 중·고등학교도 지었다. '푸른 하늘의 집'을 지어 그들이 꿈을 품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그때 4살이던 아이들은 이제 직장에 다니기도 하고, 벌써 엄마가 된 아이들도 있어요. 자식을 안고 저를 찾아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어요. 참 행복하고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죠. 학교에서도 안 받아 주던 아이들을 일등생, 모범생으로 키워 내보냈으니 마을에서도 관심의 대상이었죠."

그러나 아이들과는 이별을 해야 했다. 어린이집을 소개했던 주교가 다른 교구로 이동하면서 노숙자들의 쉼터인 '새삶센터'를 넘기고 갔기 때문이다. 2개의 센터를 운영할 수가 없어 어린이집은 다른 수녀회에 맡겼던 것.

아무것도 없는 새삶센터를 교육센터로 만드는 데 그는 몇 년을 바쳤다. 센터는 무료식당, 진료소, 부녀자 학교, 어린이 교실, 이발소, 목욕탕, 옷가게, 샤워장, 도서관, 영화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새삶센터 식구들에게 수업하는 유위숙 수녀

 "센터에는 매일 60∼100명, 성탄절 등의 행사가 있으면 300여 명 정도가 북적대고 있어요. 봉사자들도 30명 정도가 되죠. 대개 마을 사람들로, 똑같이 가난하답니다. 가진 것은 없지만 남을 돕고 싶은 마음만 있는 사람들이에요. 자기가 지닌 재능을 기부하죠. 음식 조달은 동네를 돌면서 구걸을 한답니다. 돈이 크게 들어가는 일은 한국에 있는 친구나 가족에게 손을 벌리고 있습니다."

콜롬비아 정부나 교회 등은 복지시설에 지원하지 않는다. 뜻이 있는 독지가가 어쩌다가 도와주기도 하지만 유 수녀가 거의 도맡아 센터를 만들었다. 센터를 짓고 정착시키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의 어금니는 성한 곳이 없다. 다행히 주콜롬비아 한국 대사 부인이 이 사실을 알고 주치의를 소개해줘 현재 치료를 받고 있다.

스페인어를 정식으로 배운 적 없는 그가 현지인들과 어떻게 소통했을까. "언어를 익히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겸손해했지만 봉사의 과정 속에 그 답이 있었음을 알려줬다.

"언어라는 게 꼭 말을 배워서 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그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말을 쓰니까 가능해지더라고요. 언어란 문화와 같이 온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들을 사랑하니까 그들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수녀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간절함. 뭐 그런 것들이 언어를 잘하는 비결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에콰도르에서 10년, 콜롬비아에 가기 전 한국을 왕래한 1년, 콜롬비아 18년. 모두 합쳐 29년. 그는 25살부터 봉사로 청춘을 바쳤다.

현지에서 '에르마나'(수녀님), '마드레'(어머니의 존칭)로 불리는 그는 현재 노숙인들의 자랑이다. 잘사는 나라 한국에서 온 수녀가 자기편이라는 사실에 뿌듯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봉사를 계속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스페인 말로 답했다. "자기 스스로 만든 일에 희생자"라고. 하느님이 제일 좋아하는 일, 기쁜 일을 하고 있기에 시기를 정할 수 없다는 뜻이다.

 

새삶센터의 어린이들과 함께한 유위숙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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