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직접 보고 싶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그늘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서로를 짓밟으며 새로운 계급을 만드는지 '왕의 무덤인 거대한 돌덩이'에 묻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지쳐 있을 때 눈에 띈 책이 윌리엄 골딩의 소설 <피라미드>다.
"내 코는 그녀의 머리칼로부터 몇 센티미터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내가 맡는 냄새가 위쪽 울타리 속에서 불타는 유혹과 뒤섞인 여름 내음인지 그녀 육체의 향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냄새를 맡을 수 있든 없든, 나는 그녀의 몸이 얇고 희푸른 면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 몸도 솟아올랐다. 나는 그녀의 팔을 잡고 끌어당겨 세게 키스했다…"
이는 노벨문학상을 탄 윌리엄 골딩의 자전적인 소설, <피라미드>의 한 구절이다. 윌리엄 골딩은 <파리대왕>이라는 소설로 인간의 본성과 도덕성을 신랄하게 풍자했는데, <피라미드>에서는 인간의 폐쇄성과 계급성을 직설적인 화법으로 보여준다.
<피라미드>는 가상의 작은 마을인 '스틸본'에서 벌어지는 세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주인공 올리와 이비, 보비의 삼각관계와 욕망의 계급적 의미 및 성의 폭력성을 보여주고, 두 번째는 오페레타 공연을 둘러싼 위선적인 계급 의식을, 세 번째는 올리의 피아노 선생인 돌리시 부인과 공업사를 운영하는 헨리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계급 탄생의 비화를 그린다.
"그녀는 뛰기 시작하며 말을 꺼냈는데, 그녀의 말은 그녀의 몸놀림만큼이나 가지런하지 않았다. "내가 죽어도 네가 무슨 상관이겠어. 아무도 상관 안 해. 네가 원하는 건 이놈의 몸뚱이지 내가 아니잖아. 다들 내 몸뚱어리를 원하지,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아..."
의사 아들인 보비에 대한 질투심에 올리가 보비의 여자친구인 이비에게 성적인 폭력을 가하려 하자, 이비는 자신의 몸뚱어리를 저주하며 한탄을 토해낸다. 어린 시절부터 성적 학대를 받았던 그녀는 한 번도 평등과 배려가 넘실대는 섹스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피라미드의 제일 밑에 있는 피지배자이자, 피해자로 살았다.
자, 1911년에 태어난 윌리엄 골딩이 계급적인 사회의 부조리를 말했다면, 지금은 계급이 없이 자유와 평등으로 물결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을까? 어쩌면 이 말에 흔쾌하게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갑질'이라는 권력의 먹구름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섹스에서조차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존재한다. 그 지배자가 남자일 확률이 높을 수 있다고 해서 모든 남자가 지배자는 아니다. 어쩌면 지배자들의 나쁜 면이 크게 두드러져 배려의 옷을 입은 남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편, 잠깐의 섹스 지배자였던 18살의 올리는 이비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성적 대상'으로만 대했다. 성적 욕망이 최고치를 갈아치우는 피 끓는 젊은이에게 '섹스의 지배자'라는 타이틀은 굉장히 매력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래서 10대, 20대의 가해자들이 늘어나고, 그들의 욕망을 부채질하는 수많은 섹스 산업들이 창궐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섹스에서 계급을 없앨 수 있을까. '섹스의 계급을 타파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행진을 해야만 할까. 그래서 섹스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해 삭발을 감행하며, 단식 투쟁을 하다 응급실에 실려 가는 누군가가 등장해야만 할까.
그런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도 해법은 있다. 단, 매우 개인적이고, 은밀해서 널리 보급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다.
계급을 없애기 위해서는 '앞에 있는 대상이 아무리 섹시해 보여도 성적 대상으로 보지 않기, 욕망이 고개를 내밀어도 사람이라 여기기, 그리고 진실로 사랑하기'를 실천해야 한다.
성적 대상이 아닌 인간은, 사랑받는 느낌이 충만할 때, 신체 일부가 아닌 온몸으로 자신을 사랑한다고 판단할 때, 바로 그때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비로소 평등의 구름 위에 안착할 수 있다.
뜨거운 태양이 우리의 가식을 태우는 초여름, 계급을 없애는 따뜻한 배려로 만찬과 같은 섹스를 즐기길. 계급의 피라미드를 무너뜨리는 멋진 쾌감에 사로잡히길.
■ 이지운 작가·시인 = 광고·홍보·전시 등 영상 시나리오 1000편 이상을 쓴 전업작가로 <서정문학> 제59기 신인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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