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작품 원고 문화재는 처음

▲ 윤동주 친필원고. ⓒ 문화재청
▲ 윤동주 친필원고. ⓒ 문화재청

일제강점기에 독립을 꿈꾼 저항시인 윤동주(1917∼1945)와 이육사(본명 이원록·1904∼1944)가 쓴 친필원고가 문화재가 됐다.

문화재청은 '윤동주 친필원고'와 '이육사 친필원고 '편복''을 포함해 항일독립 문화유산 5건과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을 문화재로 등록했다고 8일 밝혔다.

일제강점기 사전 편찬을 위해 작성한 △말모이 원고 △조선말 큰사전 원고 △1925년 출판한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초판본 4권이 문화재로 등록된 적은 있으나 일제강점기 우리 문학가가 쓴 작품 원고가 문화재가 된 것은 처음이다.

윤동주 친필원고는 윤동주가 남긴 유일한 원고로 개작한 작품을 포함해 시 144편과 산문 4편이 담겼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같은 개별 원고를 묶은 시집 3책과 산문집 1책, 낱장 원고로 구성됐다.

이 원고들은 윤동주 동생인 윤일주와 윤혜원이 모았고 윤일주 가족이 2013년 2월 윤동주 모교인 연세대에 기증했다.

이육사 친필원고 '편복'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현실을 동굴에 매달려 살아가는 박쥐에 빗댄 시로, 훌륭하고 중량감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탈고 당시에는 사전 검열에 걸려 발표하지 못했으나 1956년 '육사시집'에 처음 수록되면서 일반에 알려졌다. 이 원고는 유족들이 소장하다가 경북 안동 이육사문학관에 기증했다.

등록문화재가 된 다른 항일독립 문화유산은 '대한민국임시의정원 문서', '조일관계사료집', '장효근 일기'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문서는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이 1945년 8월 17일까지 개최한 정기회와 임시회 회의록을 포함한 자료로, 임시의정원이 만든 기록물 중 유일하게 현존한다.

임시의정원 의장을 네 번 지낸 홍진(1877∼1946)이 1945년 12월 1일 귀국할 때 들여왔고, 1967년 국회도서관 소장 유물이 됐다. 임시정부 활동 내용과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소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 조일관계사료집. ⓒ 문화재청
▲ 조일관계사료집. ⓒ 문화재청

조일관계사료집은 임시정부가 1919년 편찬한 유일한 역사서 4책으로 조선총독부 등 일제 기관이 발간하는 선전물이 식민통치 실상을 왜곡한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국제연맹에 독립 당위성을 요구하기 위해 간행됐다.

삼국시대 이후 역사를 한일관계사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식민탄압 잔혹성과 3·1 운동 전개 과정을 정리했다. 당시 100질이 출판됐으나 국내에는 독립기념관에 유일한 완질본이 남은 것으로 파악됐다.

장효근 일기는 독립운동을 한 언론인 장효근(1867∼1946)이 1916년부터 1945년까지 거의 매일 기록한 한문체 일기다. 장효근은 신문을 창간하고 발행하며 계몽운동을 펼쳤고, 1919년 2월 27일 천도교가 운영하던 인쇄소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 2만여 매를 인쇄해 배포했다는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항일독립 문화유산과 함께 등록문화재가 된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주택은 해방 이후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을 수용하고자 소 막사를 주거 시설로 변용한 건물이다.

광주광역시에 있는 1950∼1960년대 건축물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과 '천주교 광주대교구청-본관, 헨리관, 식당동'은 문화재로 등록 예고됐다.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구 본관은 1951년 완공돼 광주의대 본관, 전남대 본부로 사용됐고, 지금은 전남대 의학박물관이다. 한국전쟁 중에도 건물을 계속 지었다는 점과 세련된 디자인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천주교 광주대교구청-본관, 헨리관, 식당동은 1961년 대건신학교 건물로 건립됐다. 본관을 중심으로 헨리관, 식당동과 등록문화재 제681호 브레디관이 지상, 지하로 모두 연결된 점이 특징이다.

▲ 천주교 광주대교구청-본관, 헨리관, 식당동. ⓒ 문화재청
▲ 천주교 광주대교구청-본관, 헨리관, 식당동. ⓒ 문화재청
저작권자 © 누구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언론 세이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