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플로라와 걸어가면서 그 아이가 오빠와 마찬가지로 나와 거리를 두지 않는 듯하면서도 나를 내버려 두고, 또한 주변을 맴돌지 않는 듯하면서도 나를 뒤따라온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아이들은 성가신 편도, 결코 무관심한 편도 아니었다… (중략) 나는 아이들이 만든 세계 속에서 거닐었고, 아이들은 나의 세계에 조금도 의존하는 법이 없었다…."

헨리 제임스 소설 <나사의 회전>의 한 구절이다. 120년 전인 1898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서서히 회전하며 조여오는 나사와 같은 팽팽한 긴장'을 극대화한 유령 소설이자, '인간의 복합적인 심리'를 건드린 심리 소설이기도 하다.

모호한 세계의 모호한 공포, 그리고 모호한 결말. 이 책의 독자라면 이러한 단어들이 떠오를 것이다. <나사의 회전>은 열린 결말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안겨줌으로써 인간은 객관성을 갖기 힘든 존재이며, 인간이 느끼는 주관적인 사건들이 얼마나 모호한지 일침을 가한다.

자, 이제 이 소설의 내용을 들여다보자.

성탄 전야에 모여 유령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고, 이어 가정교사인 여성의 1인칭 서술을 통한 이야기로 전환된다. 블라이의 시골 저택에서 부모를 잃은 두 남매, 플로라와 마일스의 입주 가정 교사가 된 화자는 아이들을 잘 보살펴야겠다는 책임감을 강하게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하게도 쫓겨난 하인 피터 퀸트와 전임 가정교사 제셀 양의 유령과 맞닥뜨린다. 그녀는 유령들이 아이들을 해칠 거라 판단하며, 아이들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하지만, 이로 인해 플로라와 사이가 나빠지고 결국 플로라는 런던으로 떠난다.

그날 밤, 저택에 있던 그녀와 마일스 앞에 퀸트의 유령이 나타나고, 이 유령에 빙의된 마일스는 그녀의 품에서 여린 심장의 고동을 멈춘다.

▲ 헨리 제임스
▲ 헨리 제임스

"하녀가 함께 있을 동안 우리는 잠자코 있었다. 내게는 엉뚱하게도 마치 신혼여행 중인 어느 젊은 부부가 여관의 시종 앞에서 수줍음을 느낀 채 잠자코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녀가 물러가자 마일스가 내게 몸을 겨우 돌렸다. "그런데 우리만 남았네요!"

자, 이제 다른 시각으로 이 책을 접해보자.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한 공간에 당신과 그(또는 그녀) 둘만 남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사무적인 관계이긴 해도 마음속으로는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그런 모호한 관계라고 한다면 둘의 관계를 진전시킬 방법은 없을까?

섣불리 시도했다간 괜히 낭패를 볼 것 같은 불안감이 감돌고, 그 사이로 고동치는 심장 소리가 공간을 흔들고, 어색한 남녀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헛기침만 해대는 그런 상황이다. 모호한 관계를 확실한 관계로 만들 수 있기 위해 두 사람의 머릿속의 나사는 쉴 새 없이 조였다 풀었다 하며 열심히 회전하고 있을 것이다. 정말 묘안이 없을까?

내가 그런 상황이라면 나는 그에게 친구의 일인 양, 드라마의 스토리인 양, 모호하게 돌려서 고백할 것 같다. 이때, 가장 필요한 건 창의력이다. 나중에 일이 틀어졌을 때, 살짝 빠져나올 틈이라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게 필요 없다는 직진형 인간이라면 그냥 고백해도 되지만, 자칫하면 나사가 풀림으로써 대형사고가 일어날 수 있으니 주의하시길.

자, 창의력이 풍부한 당신의 고백을 그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 몸으로 표현을 할 수밖에 없다. 긴 머리를 틀어 올려 목덜미를 노출한다든가, 재킷을 살짝 벗는다든가 하는 아주 식상하지만, 적중률이 높은 시그널을 보내라. 그런데도 무심한 남자라면 아예 더 이상의 행동은 하지 말자. 그것은 기회를 포착하는 민첩성과 순발력이 떨어지므로 당신에게 독립적인 섹스를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의존하지 않는 섹스를 하기 위해 순발력과 창의력을 갖춘 상대를 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모호한 아름다움은 문학 속에 존재할 때는 그럴듯하지만, 현실에서는 고혈압을 유발하는 굉장히 기분 나쁜 존재다.

누군가와 모호한 관계라면 제발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짝만 걸어 나와라. 모호함의 안개 뒤에 숨지 말고 당당하게 나서는 당신을 진심으로 열렬히 응원한다.

■ 이지운 작가·시인 = 광고·홍보·전시 등 영상 시나리오 1000편 이상을 쓴 전업작가로 <서정문학> 제59기 신인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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