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는 ○○대학교에서 선교단체 간사를 하면서, 교수가 과제물로 내준 책을 읽은 학생이 서평을 쓰겠다고 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약간 뽀로통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 글쎄, 원래 10대와 20대는 허용된 범위 안에서의 실수를 피이드백(feedback)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시기야. 그래서 이를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허용해줘야 해. 그것을 원천봉쇄하고 청춘이니까 아픈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 것은 좀 심하네. 이건 사회가 져야 할 책무를 전부 젊은이들에게 짐 지우는 것이야."

요즘 힐링(healing)이라는 말이 너무 많이 넘쳐나서 대체 어떤 것이 진짜인지 헷갈립니다. 선교단체의 간사를 할 때 학생과 나눴던 이야기가 다시 생각났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청춘의 아픔을 그들만의 몫으로 돌린 채 기성세대는 이를 방기하고 있는 현실을 어쩔 수 없다고 하면 안 됩니다. 청춘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 그냥 젊은 사람들이 알아서 책임지라고 하면 다음 세대의 희망이 줄어듭니다. 사회적인 책임 회피와 개인적인 망각은 힐링이 될 수 없습니다.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어디에 가서 잠시 모든 것을 잊고 쉬고 온다고 해서 힐링이 될까요. 감정적인 이유기를 지내고 오는 것은 힐링이 아니라 휴식입니다. 힐링은 나와 사회가 풀어가야 할 문제를 직시하고 그 문제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 일이 어차피 우리가 겪어야 하고 짊어져야 하는 것이라면, 일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지혜부터 찾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해법이 안 보일 경우 고통을 같이 나눠질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거나 만나는 것도 좋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대속물(代贖物)로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마가복음 10:45). 그런데 대체 누가 십자가에 매달려 대속물이 되는 것을 좋아했겠습니까. 스스로를 대속물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자기이해는 일반 사람들, 심지어 제자들에게도 심리적으로 엄청난 압박감을 줬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기이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님의 삶에서 우울함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니체(Nietzsche)는 "상처가 너를 죽이지 않는다면 너를 키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죽이는 상처가 아니라 살리는 상처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고 설탕 같은 위로만 너무 좋아하다 보면 마음이 당뇨병에 걸립니다.

희로애락은 넷으로 독립돼 있지 않고 서로 연합한 하나의 성분입니다. 각각의 성분이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분노와 슬픔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마음 상태는 비정상입니다. 이때 위로의 설탕을 듬뿍 쳐서 기쁨과 즐거움만을 늘리려 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상처를 직시하는 시각의 유희를 통해 분노와 슬픔을 깎아내리는 방향으로 사고의 시선을 돌려 보십시오. 상처에 설탕을 치려거든 1/3만 치고, 2/3는 상처가 스스로를 깎아내리도록 해 보십시오.

어떤 상처는 내가 이것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이뤄집니다. 이런 상처에 굳이 새 살을 덮으려고 다른 곳에 가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상처로 인해 때로 나와 비슷한 아픔을 지닌 이들을 품을 수 있고, 그들에게 내가 힐링의 휴식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상처는 그대로 두고 살아가는 것이 더 낫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풀렸던 근육도 다시 뭉치기 마련이고 마음도 다시 뭉쳐 딱딱해집니다. 그러므로 풀린 근육을 움직여 굳어진 근육을 풀 듯, 마음도 스스로 움직여 굳은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자기치유능력을 갖추게 해야 합니다. 특별히 남에게 위로를 주는 내 마음 안의 상처는 같은 고통을 앓는 이들과 공유함으로써 상처가 스스로를 깎아내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 정이신 논설실장·목사 = 한양대 전기공학과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독립교회 및 선교단체연합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아나돗학교 대표간사와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다. 독서와 글쓰기를 주제로 한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를 연재했다.

저작권자 © 누구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언론 세이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