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소설 '모렐의 발명'
▲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소설 '모렐의 발명'

"오늘, 이 섬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여름이 앞질러 온 것이다. 나는 수영장 옆으로 침대를 옮겨 내놓았지만,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주 늦은 시간까지 물속에 들어가 있었다..."

라틴아메리카 환상 문학의 선두주자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의 소설 <모렐의 발명>의 첫 문장이다. 현대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절친한 벗이기도 한 카사레스 작가는 이 첫 문장에 앞으로 펼쳐질 극의 전개에 대한 힌트를 숨겨 놓았다. 기적, 앞질러 온 여름이 그것이다.

간략하게 줄거리를 말하자면 이렇다. 사형 선고를 받은 남자(화자인 '나')가 목숨을 걸고 '빌링스'라는 무인도로 탈출한다. 어느 날, 굶주림과 불안과 공포로 몸부림치던 '나'의 눈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중, 석양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여인 포스틴에게 한눈에 반한다. 여인을 보자, '나'를 괴롭히던 모든 것들이 일시에 사라진다. '나'는 여인에게 고백하려고 했지만, 여인은 언제나 그녀의 곁에 있던 모렐이라는 남자와 함께 '나'를 투명인간 취급한다.

'그들이 자신을 잡으러 온 경찰이 아닐까'하는 공포의 나날을 지내던 '나'는 그들의 정체를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들은 모렐이 만든 영상 속 존재들이었다. 그가 몰래 찍어둔 며칠간의 생생한 영상이 섬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었던 것이다. 포스틴을 사랑한 그는 견딜 수 없는 그리움과 외로움에 시달리다 결국 모렐의 발명인 영상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 '모렐의 발명' 속 삽화
▲ '모렐의 발명' 속 삽화

"극도로 불안한 순간에 나는 도저히 사리에 맞지 않는 허황된 상상을 했다. 그것은 인간과 섹스는 강도 높게 오랫동안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포스틴을 짝사랑하던 '나'는 오랫동안은 고사하고 잠시라도 머물고 싶었다. 만질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그녀의 손을 부여잡기 위해서 그렇게 영상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환상과 상징이 난무하는 <모렐의 발명> 속에는 고독과 고립이 만든 눈물겨운 사랑이 담겨있다. 물론, 이것은 촉각까지 느낄 수 있는 입체적인 영상, 즉, 지금의 4D 영상 수준을 뛰어넘는 작가의 탁월한 상상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사레스 작가도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강도 높게 오랫동안 지속할 수 없던 섹스가 지속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사람과 거의 유사한 외모의 섹스 로봇이 그 주인공이다.

게다가 더 진화한 '하모니'(Harmony)라는 섹스 로봇은 실제 사용자와 대화할 수 있고, 표정이나 말도 실제와 비슷하게 재현할 뿐만 아니라 간단한 질문에 대답하거나, 야한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용자의 음식 및 영화나 음악 취향 등의 개인 정보를 기억하고 학습한다고 한다. 이 말은 내가 좋아하는 얘기를 나누고, 내가 하고 싶을 때마다 섹스를 즐길 수 있다는 얘기다. 남자의 정력에만 문제가 없다면 횟수에는 상관없이 섹스를 즐길 수 있으니 <모렐의 발명>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단한 발명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을 하는 게 대화의 기쁨일까? 섹스가 과연 욕망만을 채우는 것일까?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내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받아주는 상대는 꼭 필요하지만, 꼭 긍정적인 반응을 한다고 좋은 관계는 아니다.

나와는 다른 의견을 내는 상대를 통해 인간은 성숙해진다. 섹스도 마찬가지다. 나와는 다른 욕망을 원하는 상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수록 섹스 로봇이 줄 수 없는 아찔한 쾌감이 뒤따른다. 그 쾌감이, 그 진화된 관계가 주는 절정의 판타지를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심장이 손까지 내려온 듯 무수한 박동으로 가녀리게 떨리는 그의 손을 잡았을 때의 쾌감을 과연 섹스 로봇이 대신해줄 수 있을까. 무수한 빛이 환하게 비추는 절정의 골짜기를 함께 달려갈 때의 그 전율을 대신해줄 수 있는가 말이다.

성숙한 관계를 위해, 성숙한 섹스를 위해 오늘 밤을 불태우자. 시도도 하지 않고 괜한 호기심에 만 달러나 하는 섹스 로봇 주위를 배회하지 말고, 진심을 담아 몸으로 이야기를 나누자.

거짓의 껍데기가 홀라당 벗겨질 때 진실의 쾌감이 그 자리를 채울 테니 말이다.

■ 이지운 작가·시인 = 광고·홍보·전시 등 영상 시나리오 1000편 이상을 쓴 전업작가로 <서정문학> 제59기 신인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저작권자 © 누구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언론 세이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