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성에 가고 싶다] 질투가 존재하지 않는 섹스란 없다
[그 성에 가고 싶다] 질투가 존재하지 않는 섹스란 없다
  • 이영주ㆍ작가
  • 승인 2018.01.12 17:03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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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브그리예의 소설, 질투
▲ 로브그리예의 소설, 질투

그는 갑자기 기운을 차리고 팔걸이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잔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낮은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안녕히 가세요." A…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말한다. "감사했습니다." 프랑크는 팔을 한번 휘두른다. (작가는 아내 이름을 실명이 아닌 독특한 방식의 'A…'으로 표현했다.)

사양을 나타내는 의례적 표시다. A…는 뜻을 꺾지 않는다. "웬걸요! 이틀 동안 제가 괴롭혀드렸잖아요." "천만에요. 오히려 누추한 호텔에서 밤을 지내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는 두 발자국 걸어가다가 집을 가로지르는 복도 바로 앞에 멈춰서 반쯤 몸을 돌린다. "게다가 기술이 형편없어서 죄송합니다."  그의 입술에는 먼저와 똑같이 찡그린 표정이 아까보다 조금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누보로망의 선두주자인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 <질투>의 한 구절이다. 이 소설에는 다른 소설과는 달리 이야기가 없고, 객관적인 묘사와 관찰이 난무하다.

그래서 한 줄 한 줄을 읽는 게 일보일배하는 수행자처럼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줄거리를 말하자면 이렇다. 프랑스의 식민지인 아프리카 어느 지역에 화자와 그의 아내인 A…가 살고 있고, 이웃에 프랑크와 그의 아내가 살고 있다.

화자는 아내인 A…와 프랑크의 관계를 시종일관 의심하며 밀착 카메라가 따라가듯 둘의 시간과 공간을 쫓는다. 위의 묘사처럼 둘은 함께 차를 타고 시내로 가서는 '차가 고장 났다'는 핑계로 하룻밤을 자고 온다.

둘의 대화에서 '괴롭혔다'라느니 '기술이 형편없다'라느니 하는 말들은 섹스를 연상시키며 화자의 질투를 더 자극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은 우리가 원하는 결말 - 불륜의 증거를 찾는다는 등 - 없이 평범하다 못해 처절한 묘사로 막을 내린다.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따라 머리빗이 바람 소리와 함께 탁탁 튀는 가벼운 소리를 내면서 밑으로 내려온다. 아래까지 내려오자 머리빗은 곧바로 머리 위로 돌아가 두피를 다 훑고 이어서 검은 머리 타래를 미끄러져 내려온다…

아내 A…가 머리를 빗는 이 모습은 마치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자,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거칠어지는 전희를 연상시킨다. 왜 작가는 '질투'라는 제목을 달고, 남편과 아내의 심리 묘사는 결코 하지 않은 채 소름 끼칠 정도로 사물의 정밀 묘사만을 했을까.

오히려 "아내가 이웃집 남자와 잤다. 그래서 나는 미쳐버리겠다." 이렇게 쓰면 독자의 공감을 얻었을 텐데 말이다. 작가는 어쩌면 사랑의 원초적인 질투라는 감정을 좀 더 객관적인 서술을 통해 섬찟하리만큼 강렬하게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알랭 로브그리예 작가
▲ 알랭 로브그리예 작가

자, 사랑이 가득한 섹스를 할 때도 과연 질투를 할까? 만약에 질투를 한다면 그 대상은 누구일까? 상대에 대한 막연한 질투일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섹스를 했을 때도 이토록 즐거워했을까'하는 과거형 질투일까? 내일이라도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할지도 모른다는 미래 불안형 질투일까?

사람마다 질투의 유형은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타인이 전혀 개입하지 않아도 질투는 언제나 둘의 관계를 친밀하게 하는 윤활유처럼 잽싸게 파고 들어온다. 절정의 타이밍이 다른 것도 그 이유겠으나, 잘할 때에도 질투를 느낄 수 있다는 게 문제다.

항상 꿈꾸던 백마탄 왕자님이 어쩜 그리도 원하는 곳을 기가 막히게 자극하는지, 경험하지 못한 쾌감으로 전율하면서도 '혹시 이 남자 선수 아냐?' 하는 의심의 눈초리 속에 질투가 살랑살랑 꼬리 치며 찾아 들곤 한다.

아니면 꿈에 그리던 섹시녀가 상상했던 자세와 그 느낌 그대로 리드한다면 증폭된 쾌감 속에서 '혹시…' 하며 질투를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왜 둘만의 시간속에서조차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누군가와 질투라는 소모적인 감정놀음에 빠져들까. 보이지 않는 상대와 보이는 상대에게 동시에 질투를 느끼는 것은 비교하기 좋아하는 인간의 오랜 습성 때문이리라.

섹스할 때 언제나 절정에 오를 필요는 없다. 매번 산에 오를 때 정상을 올라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무겁게 걷는 등산객도 있지만, 느린 걸음으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하는 사람도 있다.

때로는 정상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쾌감도 필요하지만, 대화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소소한 쾌감도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를 질투하며 정상을 향해 달리기보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산책해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질투를 등에 업고 도망가는 바람의 뒤태를 감상하시길…

■ 이영주 작가 = 서울산업대학교(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매체공학을 전공하고 광고ㆍ홍보ㆍ전시 등 영상시나리오 1000편 이상을 쓴 전업작가다. 최근 휴먼 판타지 소설 <더 아일랜드>를 출간했다. <서정문학> 제59기 신인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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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홍철 2018-01-23 15:51:48
흠..좋군요

독자G 2018-01-17 19:47:48
질투는 "그" 대상을 차지하고싶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하나의 온전한 상태로 차지하고 싶지만 오롯이 가질 수가 없기에 불안하고 불안해할수록 집요해지는 하나의 "일그러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명상 2018-01-12 20:30:13
질투? 본능이지요

dhk1909 2018-01-12 20:01:37
인간의 뇌는 대단합니다. 질투도 욕심도 소유도 야심도 ... 알 수 없는 동물

오정숙 2018-01-12 18:16:07
질투의 에너지가 자기 파괴적 에너지로 변질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