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흘리개 시절 서울 촌놈에게 안양천 변의 가설극장은 그야말로 문화적 충격이었다. 음향도 시원치 않은 흑백 한국영화는 밤잠을 설치게 하는 흥분이었다.
청소년기 한국영화는 시시한 단체관람 영화로 치부되고, 벤허를 비롯한 할리우드 영화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후 중년 명함을 받을 때까지 할리우드는 내 영화 감성을 지배하게 된다.
2000년을 전후로 한국영화도 제작 수준이 급격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마 <쉬리(1999)>가 그 시발점으로 기억된다. 물론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이 후 한국영화는 나에게 외화와 대등한 수준, 아니 그 이상으로 대접받기 시작된다.
영화 <1987>은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 군의 죽음을 모티브로 한다. 박종철군은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했다. 처연한 역사적 진실이 그 후 30년이 지난 오늘날 영화 속에서 재현되고 있다.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희대의 코미디 같은 대사를 남긴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은 같은해 6월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한 획을 긋게 된다.
당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에 의해 밝혀진 보도는 지금도 생생하다.
전두환 정권 말기인 1987년은 서슬 퍼런 '보도지침'의 광풍이 거셌다. 그러나 이 폭압은 용기있는 지성인들까지 막지는 못했다.
성균관대 교수인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는 이 사건을 최초로 보도했고,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는 부검의를 설득해 양심선언을 이끌어 냈다.
역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이부영씨는 감옥에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비밀쪽지를 건네 이 사건이 세상에 퍼지는 기폭제를 만들었다.
언론인만이 아니라 최환 변호사는 경찰의 은폐를 막기 위해 박종철군의 부검을 지시했다. 최환 변호사는 6·10항쟁후 서울지검장을 맡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구속한 사람이다.
이밖에 김승훈 신부에게 쪽지를 전달한 김정남씨 등 일반인들도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떠받치고 갔다. 영화속 인물들은 모두가 사실이다.
박종철군을 고문하고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고문기술자' 이근안도 여전하다.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말한 장본인이자 이근안의 도피를 도왔던 박처원 치안감도 현존한다.
1999년 간암으로 별세한 윤상삼 기자를 제외하고는 정권에 충실한 사람들과 역사에 충실한 사람들 모두 한 하늘을 이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다.
박종철군 고문과 사건은폐에 가담한 자들도 나름대로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설령 조작이 성공했다 해도 역사는 그 들을 정의롭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팩트를 근거로 하는 한 편의 영화와 다름없다. 오랜 시간이 흘러 지나온 역사를 반추해볼 때 "나는 당당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한다. 한 나라의 역사건 개인의 역사건 마찬가지다. 역사의 평가는 엄중하며 진실하기 때문이다.
2017년 겨울 차가운 광화문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의 열기 속에 울리던 말이 기억난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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