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이라는 숫자가 있었습니다. 0은 외롭고 초라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곁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0은 자기와 함께 있어 줄 친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맨 처음 만난 것이 1이란 숫자였습니다. 1은 자신이 보기에 초라해 보이는 0을 상대해 주지 않았고 자기보다 더 큰 숫자를 찾아 떠나버렸습니다. 0은 2, 3, 4 등 많은 숫자를 만나 봤지만 그들은 모두 작고 초라한 0의 친구가 되기를 거절했습니다.

0은 좌절감을 느끼며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친구로 받아주지 않는 이들의 행동을 보고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알게 됐으며, 이에 환멸을 느끼고 자신을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때 숫자 1이 역시 초라한 몰골을 하고 다시 0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1도 0과 마찬가지로 친구를 찾아 헤맸지만, 자신보다 큰 거만한 숫자들에게 친구가 되는 것을 거절당하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1과 0은 친구가 돼 힘을 합치기로 하고 10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지금까지 0과 1을 무시했던 다른 숫자들이 모여들어 이들에게 친구가 되자고 간청했습니다.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작가가 쓴 동화의 한 대목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성령님의 뜻에 따라 세운 초대교회를 보면 구성원들이 대부분 이와 비슷합니다. <고린도전서 1:26>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성도에게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께 빠진 사람들은 주로 2, 3, 4 등과 같이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는 주로 0이 기본이었고, 많아도 1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0이나 1과 같은 사람들이 만나 10을 만들었더니, 그때부터 2, 3, 4 등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곁에 와서 친구가 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마침내 로마제국의 국교까지 됐습니다.

10은 1과 0이 만나서 만든 숫자였습니다. 0이나 1 혼자 만들어낸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기독교 구원의 특이성이 담겨 있습니다. 시작은 '나의 하나님'이지만(출애굽기 20:2) 끝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고린도전서 2:2) 기독교 구원의 서정입니다.

한국에서 발생한 사이비·이단의 교주들 중에 '구원은 개인전' 혹은 '신앙은 개인전'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펼치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입니다.

▲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목사
▲ 정이신 아나돗학교 대표간사ㆍ아나돗공동체 목사

성경에서 말한 구원에는 이런 특성이 있기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끼리는 반드시 신앙의 공동체를 이뤄야 합니다. 이 공동체를 통해 굳은 자아를 깨뜨리고 거듭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2, 3, 4 등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혼자서 자신은 특별한 1이나 0이라고 주장하거나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자기의 주장만을 앞세우면 교회에 무리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개별 교회법이 교단법이나 총회법보다 우선한다'는 식의 망언을 남발하면 아무도 그의 곁에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교회 안에서는 반드시 자아를 깨뜨리고, 둘이 합쳐 10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세상의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0과 1이 만난 후에도 구원을 얻기 위한 질서가 필요합니다. 만약 예수님을 만났다고, 이제 죄를 용서받고 의인이 됐다고 자기주장을 앞세우며 10이 아니라 01을 만들면 다시 도루묵이 됩니다. 10을 만들 때 1이 0보다 빼어나서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세다는 9를 이기기 위해 서로 공감으로 섬기면서 동행하라고 1을 앞세우는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1이 0보다 앞에 있다고 0을 무시하거나 0이 자신은 1의 뒤에 있다고, 원래 아라비아 숫자의 순서대로 나열하면 0, 1, 2, 3순이기에 0 다음에 1이 오는데 왜 자신이 1의 뒤로 가야하느냐고 화를 내거나 슬퍼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먼저는 2도 아니고 0과 1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어, 세상의 악을 상징하는 9를 이기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을 만나 초대교회를 세운 사람들은 구원에 하나님이 이끄시는 이런 은혜의 질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 섬기고 동행하면서 01이 아니라 10이 됐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서로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아라비아 숫자의 순서와 배열이 다른 1과 0이 되기를 자청한 신앙의 선조들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복음을 비교적 자유롭게 접하고 있습니다.

보통 한국교회에서 담임목사라고 표현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의 담임목사는 예수님 한 분뿐이기에 위임목사라는 표현이 더 맞습니다(베드로전서 5:4). 그러나 이 글에서는 담임목사로 호칭하겠습니다. 담임목사를 개교회의 전면에 내세워 개교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이유는 01이 아니라 10이 돼 세상의 악을 이기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입니다.

담임목사라 불리는 사람이 아주 대단히 빼어나서, 예수님보다 더 빼어나서 앞에 내세우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므로 담임목사가 스스로를 빼어난 존재라고 착각하는 순간부터 그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이탈하게 됩니다.

서울 강동에 있는 M교회의 담임목사직을 부자가 세습한 문제로 한국교회가 시끄럽습니다. "지식인으로 살기 힘들다"던(세상에 글 아는 사람 되기 어렵구나 : 難作人間識字人)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외침처럼 목사가 아닌 크리스천으로 살기도 참 어려운 망나니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의 입장에서 교회의 잘못에 대해 잠잠할 수 없어서 제 직분에 걸맞은 목소리를 내려고 이 글을 씁니다. 12월이고 크리스마스인데, 한국 개신교회의 안전망이 훼손되고 있는 현실에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안타까움이 밀려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희생으로 세웠고, 복음을 전파하는 곳이기에 교회다워야 합니다. 교회가 개인의 목소리를 우선하고 공동체의 목소리를 뒷전으로 하면 교회가 아닙니다. 더불어 교회가 유기체적인 공동체가 아닌 조직체가 돼 아픈 이들의 목소리를 교회의 속도 조절을 관장하는 중추에 두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여 특정 목적을 추구하는 조직체나 공동의 이익을 꾀하는 사기업과 같아집니다.

무엇이 아쉬워서 조직체나 사기업 같은 행동을 유기체적 공동체를 바탕으로 해야 하는 교회의 이름으로 자행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이 바람직한 기독교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크리스마스의 은혜를 기억하며 교회를 다닐 수 있도록 M교회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각성했으면 합니다.

크리스마스를 유흥을 즐기는 시간으로 활용하는 사회는 안전한 사회가 아니고, 건강한 사회는 더더욱 아닙니다. 크리스마스는 송년회가 아니기에 언제나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시간이 돼야 합니다. 그래야 사회가 아름다워집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크리스마스답게 맞이하기 위해 먼저 교회가 교회다워야 합니다.

■ 정이신 논설위원ㆍ목사 = 한양대 전기공학과와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독립교회 및 선교단체연합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아나돗학교 대표간사와 아나돗공동체 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독서와 글쓰기를 주제로 한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에 이어 <아나돗편지>를 연재하고 있다. 세이프타임즈 논설실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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