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의 이슈분석 <18> 비전문성과 무책임, 안전 되레 '위협'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매뉴얼공화국’이다. 소위 없는 매뉴얼이 없을 정도다.

지난 해 국민안전처는 5천여 개가 넘는 재난대응 매뉴얼을 올해까지 450여개로 대폭 줄여 보다 실효성 있는 대비를 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각종 사고현장에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우려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다.

현장에서 사람을 살리기 위한 실질적인 매뉴얼이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행동절차라든지, 유관기관과의 협조사항 등이 내용에 포함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결국 매뉴얼을 만들고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읽어보지도 않은 두꺼운 매뉴얼은 캐비닛 속에 방치되어 있고, 설상가상으로 담당자는 수시로 바뀌는 형국이니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기 전에도 매뉴얼은 존재했으며, 메르스 사태 때도 매뉴얼이란 것은 존재했지만 모두 비참하게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없어야 한다는 반성이 있었지만 그 이후로도 무용지물인 매뉴얼은 대한민국 곳곳을 보란 듯이 농락했다. 판교 공연장 환풍구 붕괴사고, 제주 추자도 돌고래호 전복사고, 그리고 강남역 스크린도어 사고 때도 그러했다.

매번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관계당국에서는 후속대책들을 쏟아내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금세 잊히는 일이 습관처럼 반복되고 있다.

국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마련된 가이드라인이 이렇게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다보니 민간에서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매뉴얼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실례로 소방계획서라는 것을 살펴보자.

소방계획서는 소방시설 설치ㆍ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에 의해 작성해야 하는 것으로 소방대상물인 해당건물의 안전정책 및 안전관리계획 등을 사전에 검토해서 만들어 놓은 재난예방 및 대응의 초기 매뉴얼이다.

하지만 현장에 나가보면 오래 전 만들어 놓은 소방계획서를 날짜만 바꿔서 사용하는 사례가 빈번하고, 상황이 그렇다보니 이미 퇴사한 사람의 이름을 매뉴얼 속에서 찾아보는 일이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매뉴얼이라는 것은 사람의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위 관공서의 검사를 통과하기 위한 형식적 절차로 전락된 것처럼 보인다.

안전 매뉴얼은 한번 만들어서 평생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계속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충실하게 반영한 살아 움직이는 서류가 되어야 하며, 그 안에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들어있어야 마땅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전문성과 직무윤리를 가진 준비된 사람으로 하여금 매뉴얼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여기에 강력한 행정 및 재정적 지원도 필요하다.

무늬만 안전 전문가인 사람들에 의해서 자행되는 비전문성과 무책임, 그리고 소위 전문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부도덕함과 전문가 정신의 실종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안전 분야는 전문성과 업무연속성이 필요한 곳이다. 그러나 현실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로 인식되고 있다. 필요에 의해서 잠시 안전담당 부서를 거쳐 가는 사람에서부터, 어느 날 갑자기 순환보직에 의해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안전을 담당하게 된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안전이 어쩌면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옛말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제대로 된 안전 전문가 한 사람을 양성하는 데에는 오랜 인내와 투자가 필요한 것이다.

100퍼센트 완벽한 매뉴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매뉴얼, 그 매뉴얼을 성실하게 운영할 안전 전문가, 그리고 매뉴얼을 존중하고 적극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지원이 뒤따른다면 그 매뉴얼은 반드시 현장에서 효력을 발휘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본과 원칙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을 융통성 없이 꽉 막힌 사람으로 못 박고 있는 시대. 그래서 안전 불감증은 세대 간에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는 어려운 시기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매뉴얼이 그저 사무실 캐비닛에 갇힌 종이뭉치는 아닌지 꺼내서 한 번씩 읽어보고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이건 세이프타임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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