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에 '삼등 열차'

▲ 3등 열차, 오노레 도미에, 캔버스에 유채, 1860~1863, 65㎝ x 90㎝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3등 열차, 오노레 도미에, 캔버스에 유채, 1860~1863, 65㎝ x 90㎝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비행기를 타보면 퍼스트클래스, 비즈니스, 이코노미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된다. 돈이 사람을 세 개의 계급으로 나눈 것을 말이다. 

비행기 여행은 형편상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행복은 상대적이라던가. 고운 미소로 맞이하는 스튜어디스 안내에 따라 1등석, 2등석을 지나 자꾸만 뒤쪽으로 들어가는 자신이 왠지 초라하게 느껴진다.

다닥다닥 붙은 이코노미석에서 '상대적 빈곤'을 실감하는 것도 순간, 자존심도 잊고 붉은 커튼 안쪽 사람에게만 서비스된다는 그 라면맛을 궁금해 하는 자신과 마주친다. 대감마님 내외가 고기를 구워먹는 냄새를 맡으며 침 흘리는 '마당쇠 DNA'가 자신에게 흐르는 듯해서 은근히 빈정이 상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것도 비행기를 못 타본 사람에 비하면 형편이 나은 자들이 누리는 호사. 요즘 기차는 비행기와 다르게 등급의 차이가 없어진 지 오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불과 십여 년 전엔 비둘기호, 무궁화호, 새마을호 열차로 등급을 구분했었다. 서민들은 대체로 가장 싼 요금의 비둘기호를 많이 이용했다.

사라진 비둘기호를 지금의 청소년은 잘 모르겠지만, 2013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를 본 사람은 누구나 '꼬리 칸'이 의미하는 것이 뭔지 사전적 설명없이도 다 알게 된다. <삼등 열차>에서 '삼'은 최하위층을 의미한다. 소위 '흙수저'다.

아카데미즘이 한창이며 인상주의가 태동하던 시기에 활동한 도미에(Honoré Daumier 1808~1879, 프랑스)는 유명인, 고귀한 신분이 아닌 평범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이유만으로 화단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매스미디어가 발달하지 못했던 19세기. 그는 고발프로그램 PD의 심정으로 풍자적인 사실주의 그림을 그렸다. 도미에가 그린 풍자화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럽던 당시 권력층 인물들을 심하게 비꼬았기에 이목을 집중시키고 논란을 불러왔다.

▲ 오누레 도미에의 시사만화 '가르강튀아' 1831·석판화
▲ 오누레 도미에의 시사만화 '가르강튀아' 1831·석판화

주간지 <라 카리카튀르>에 실린 시사만화 <가르강튀아(Gargantua)>는 그를 감옥으로 보낸다. 7월혁명 후 왕이 된 루이 필리프 1세의 얼굴을 닮은 '가르강튀아'라는 거인이 컨베어벨트처럼 생긴 탐욕스런 혀를 내밀어 백성의 고혈을 흡입하면서 의자 밑으로는 관리들에게 훈장과 이권을 배설하듯 남발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 문제였다.

실랄하게 세태를 풍자한 대가는 6개월의 금고형과 500프랑의 벌금. 표현의 자유가 무참히 짓밟힌, 역사적인 사건의 주인공이 된 도미에.

일부 비평가는 그를 싸구려 시사만화가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도미에의 그림은 감상자에게 서민의 삶 속에서 고요한 위대함을 느끼게 한다.

<삼등 열차>속의  중심을 이루는 네 명은 가족으로 보인다. 그 뒤로 40~5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의 시선을 피한 채 무표정하게 있다. 제목 때문인지, 아니면 그림 전체의 어두운 분위기 때문인지 작품 속 인물은 대체로 삶에 지친 모습이다. 할머니에게 기대어 자고 있는 소년은 장시간의 기차여행 때문인지 잠들어 있고, 소년의 엄마는 갓난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 오노레 도미에의 '삼등 열차' 부분
▲ 오노레 도미에의 '삼등 열차' 부분

할머니의 얼굴에 깊이 새겨진 주름은 힘들게 살아 온 세월의 흔적일 터. 아마도 젊은 며느리의 미래의 모습이 아닐런지.

그러나 그림에서 절망보다 강한 희망의 불씨를 보게 된다. 뒷자리의 몇몇 부유해 보이는 남자들과 있는 무리의 침울함과는 대조적으로 가족의 표정에선 따스한 사랑과 신뢰가 그들을 감싸고 있다. 정확한 이유는 말하기 어렵지만 왠지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희망적인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서로 의지하고 따뜻한 정을 나누는 모습을 통해 빈민층을 바라보는 화가의 애정 어린 시선과 응원의 메시지가 들린다.

인간은 부유함과 위대함 둘 다 원하지만, 신은 가차없이 위대함을 위해 부유함을 버린다.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올 때 마구간에서 태어난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가난과 초라함 속에 위대함과 고귀함이 함께한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은 경이로움을 지나 숭고함마저 느끼게 된다. 밀레의 <만종>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요즘은 개천에서 용이 나기가 쉽지 않음을 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들만이 자자손손 그것을 누리기 위해 갑질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의가 아님을 알기에, 이를 바로잡고자 나서는 이가 있다면 누구라도 그의 뜻에 동조하지 않을까. 그것이 만화든, 그림이든, 신문 기사든, 방송이든, 그 어떤 의로운 이의 외침이든 ···

■ 조경희 미술팀 전문위원 = 충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미술교육학을 전공한 뒤 동 대학원에서 미술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충북 단양군에서 교편을 잡은 뒤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충북대학교 미술학과에 출강하며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현재 서울 성수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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