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의 이슈분석 <7> 소방관의 자화상(自畵像)

“지옥의 사탄은 소방관을 받아주지 않는다. 소방관이 지옥에 오면 모든 지옥 불을 다 꺼버리기 때문이다”라며 농담처럼 건넨 한 필리핀 소방관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그냥 웃으면서 넘기기에는 그 말속에 담긴 의미가 자못 숭고하기까지 하다.

미국의 소방관들은 다른 나라의 소방관들을 가리켜 '어머니가 다른 형제(Brother from another mother)’라고 부른다. 아마도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 봉사하는 같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에 대한 무한 동질감과 친밀감의 표현일 것이다.

이와 같은 소방관을 향한 긍정의 메시지는 소방관들이 명예라는 물감과 자부심이라는 붓을 가지고 행복이라는 캔버스에 자신만의 아름다운 자화상을 그려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대한민국에서 소방관으로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만의 동굴에 갇혀 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미 단단히 굳어져 버린 생각은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며, 슬럼프를 극복하기 보다는 그냥 주저앉아 순응하는 경우도 종종 목격되곤 한다.

거기에다 소방방재청 폐지와 같은 소방조직 위상의 급격한 변화가 찾아온다거나, 행여 동료가 순직이라도 하면 소방관으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낄 때도 있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힘든 일을 평생 할 수 있을지 걱정하며 다른 분야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평생 소방관으로 걸어온 긴 여정의 끝 무렵에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스스로를 위축되게 만들기도 한다.

소방에 입문한 이후 지난 20년 동안 필자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났고, 또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감사와 꾸준히 이 길을 걸어왔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이 좋아 보인다고 해서 무작정 따라가는 것이 나에게 반드시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지난 10일 필자는 베트남 소방국에서 ‘정책자문관’으로 근무하고 계신다는 전직 대한민국 소방관을 만났다. 현재 그는 대한민국 소방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베트남 사람들의 안전을 향상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새로운 시각으로 그들의 안전시스템을 진단하고, 베트남 소방관들에게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하면서 그는 양국 사이의 훌륭한 가교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비록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자신만의 멋진 자화상을 그려가고 있는 그의 무한 열정을 느끼면서 역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대한민국 소방조직이 그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자화상을 그려 나가기 위해서는 조직 내부와 외부에 쌓여 있는 지독한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장벽과 싸워야 한다.

“소방관이 뭘 알아? 그냥 현장이나 가라고 해” 라던가 “우리 조직은 힘이 없어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라는 식의 말도 되지 않는 편견과 선입견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이런 상황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과연 내가 왜 이 직업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확고한 직업관과 그 누구라도 대체 할 수 없는 자신만의 전문성이 필요하다.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국민안전을 위한 소방의 역할에 대해서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영리한 이론으로 무장하고 소방의 주장에는 귀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한 소방의 역할과 위상을 확고하게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말해야 할 때 용기 내어 말하고, 또 필요하다면 논쟁도 해야 할 것이다.

소방은 단연코 권력기관이 아니다. 하지만, 소방에게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현장이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이 도망가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소방관들은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현장에 다가간다. 누군가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는 상황에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는 법이니 이것이 얼마나 크고 의미 있는 권한인가.

시민들이 입혀준 소방관의 제복을 더럽히지 않으려면 매사에 자신을 살피고 소방의 임무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한다.

혹시라도 자기 스스로가 편견이나 선입견이란 덫에 걸려 초라한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국민안전의 버팀목’이란 명칭은 소방관 스스로가 아닌 국민들이 먼저 진심으로 불러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건 세이프타임즈 논설위원

키워드

#N
저작권자 © 누구나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언론 세이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