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 단위 한식문화·테이블별 계산문화 변화…아직은 익숙하지 않아

"각자내는 사람끼리 찢어 나눠 가지는 영수증이라도 나왔으면 좋겠어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 시행으로 '각자내기' 손님이 크게 늘면서 밀려드는 카드와 현금에 시달리고 있는 부산의 한 식당 주인의 하소연이다.

김영란법 본격 시행으로 '각자내기'가 유행처럼 퍼져가고 있지만 식당은 식당대로 손님은 손님대로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한가지 요리에 밥과 숟가락만 따로 올리는 한식문화, 테이블별 영수증 발행을 해오지 않은 계산문화, 한꺼번에 내기보다 각자내기가 카드수수료가 많이 나온다는 오해 등으로 각자내기는 아직 어색하기만 한 형국이다.

전국 식당에서 최근 펼쳐진 '각자내기' 해프닝을 엿봤다.

"각자 계산 불가합니다"김영란법 시행 이전인 지난 7월 서울의 한 식당에 '각자내기 불가' 안내문이 붙어 있다. 김영란법 시행 이후에는 각자내기가 불가한 식당이 점차 줄어들 전망이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김영란법 탓에 손님은 줄고, 계산만 복잡해진 식당

울산의 한 구청 공무원은 평소 친분이 있던 선후배 공무원 2명과 함께 울산 중구의 한 치킨집에서 6만5천원어치 치킨·맥주 등을 함께 시켜 먹은 후 '각자내기'를 하려는 데 계산하는 데만 10분 넘게 걸렸다.

혹시나 김영란법 위반 소지가 있을까 각자내기 증거를 남기려고 3명 모두 신용카드를 아르바이트생에게 내밀었는데, 아르바이트생이 카드결제기로 각자 계산하는 방법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생은 "그냥 현금으로 각자 계산하시죠"라고 말을 꺼냈지만 공무원들은 '증거'를 남길 수 없다는 생각에 끝까지 카드결제를 해달라고 요구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아르바이트생은 다른 곳에 있던 업주를 전화로 불러와 업주가 카드결제기와 한참 씨름을 하고 나서야 치킨집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공무원들 등 뒤에서는 "법이라니까 이해는 하는데, 정말 불편하다"는 업주의 푸념이 들렸다.

대구 시내 한 음식점 관계자는 "법 시행 전에야 손님 각자 내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이제는 손님 숫자만큼 계산해야 해 계산대에 서 있는 시간이 많이 늘었다"며 "손님이 늘어난다면 일하는 맛이라도 나겠지만 각자 계산해 주느라 시간 허비하며 힘만 드는 것 같다"고 울상을 지었다.

경기 수원의 한 유명 갈비전문점은 최근 POS단말기를 5만원 이하 무서명 거래가 가능한 최신형으로 교체했다.

김영란법 시행 이전에는 테이블당 한 명이 하나의 카드로 결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앞으로는 각자내기가 대세를 이룰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이 식당 관계자는 "각자내기를 하는 손님들의 빠른 결제를 돕기 위해 POS 단말기를 모두 바꿨다"며 "아직 김영란법 시행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법 적용대상인 공무원들이 많이 찾지는 않았으나 미리미리 준비를 해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함께 먹는 문화가 사라지면서 식당 매출도 줄었다.

김영란법 시행 후 손님이 많이 줄어든 경남 창원시의 한 한정식집은 그나마 오는 손님도 모두 법인카드나 개인카드로 인원수에 맞춰 결제하면서 함께 나눠마시는 술을 시키지 않는 경향을 보여 매출이 급감했다.

광주의 서구의 아귀찜 판매 식당은 대·중·소로 나눠 파는 메뉴를 1인분 단위로 바꿀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한 상 차려 놓고 나눠 먹는 메뉴를 쪼개 계산하기 어려운 탓에 손님들 불만이 적지 않은 탓이다.

전남의 한 커피전문점 업주는 최근 각자내기가 크게 늘면서 '카드수수료가 느는 것 아니냐'는 걱정에 카드결제 대행사에 문의전화를 걸었다.

결론은 한꺼번에 내든 나눠내든 카드사별로 매출의 일정 요율을 지급해 카드수수료는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부산시청 인근에서 공무원들의 각자내기에 시달린 식당업주는 "1장의 영수증만 발행하면 영수증을 사람 수대로 찢어 나눠 가질 수 있는 결제법이 등장하면 매우 편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부패·공익침해 신고센터[연합뉴스 자료사진]

◇"식당 눈치 보느라 어렵다" 각자내기 손님도 눈치

경기 안산의 한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는 A씨는 김영란법 시행일인 지난달 28일 시내 고깃집에서 술을 결들인 저녁 식사를 했다.

8만원이 조금 넘게 나온 음식값은 나눠내기로 했는데 결제 문제로 계산대 앞에서 멈칫거렸다고 했다.

카드로 계산하자니 식당 눈치가 보여 결국 현금을 내고 각자 현금영수증을 받아가자고 일행과 의견 일치를 보고 식당을 나섰다.

A씨는 "각자 카드결제를 한다고 눈치를 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단골이다 보니 식당업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각자 카드로 계산하는 건 주저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카드결제하고 결제자에게 현금을 몰아주는 행위는 나눠냈다는 증거가 남지 않아 편법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어 자제가 권고되는 행위다.

강원도의 한 대학 교직원은 김영란법 시행 이후 지갑에 항상 현금을 넣고 다닌다.

사무실 직원들끼리 한 달 점심 비용 10만 원을 걷어 식사 때마다 계산했지만, 김영란법이 시행된 이후 각자내기를 하기로 해서다.

그동안 지역경제 활성화를 이유로 교내식당보다 시내 음식점을 자주 이용했으나, 단골집마저 여러 장의 카드로 계산하는 것에 난색을 보여 될 수 있으면 교내식당을 이용하려 한다.

그는 "가게에서는 각자 카드로 계산하는 것에 난감해 하고, 그렇다고 현금을 항상 챙겨다닐 수도 없어 괜히 계산대 앞에 서면 어색하다"고 말했다.

부산 중구 남포동의 식당가를 찾는 손님들은 전골이나 찌게 등 하나의 메뉴로 여러 명이 나눠 먹을 수 있는 음식 종류보다 개인별로 독립된 메뉴를 시키는 손님이 크게 늘었다.

몇백원 몇십원까지 딱 나눠떨어지지 않는 탓에 '차라리 자기가 먹은 것은 자기가 내자'는 분위기기 확산한 탓이다.

충북도청 공무원은 각자내기의 불편함을 피하고자 부서별로 매달 일정 금액을 거두어 총무를 맡은 공무원이 현금이나 신용카드로 결제하고 나름의 '시스템'을 개발해 대응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각자내기 액수를 계산해 주는 앱과 간편하게 각자 먹은 액수를 송금하는 앱 등도 물밀듯 등장하고 있다.

광주의 한 공무원은 "대학 주변에서 각자내기하는 학생들이 많아 이제는 자연스러운 문화가 됐듯이 김영란법이 정착돼 각자내기 문화가 널리 퍼지면 '함께 먹기', '영수증 발급' 등 한국식 음식문화가 상당 부분 바뀔 것 같다"면서도 "아직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영란법 시행후 바뀐 음식문화 김영란법 시행이후 분비는 구내식당(왼쪽 사진)과 한산한 일반 식당가 [연합뉴스 자료사진]

김선호ㆍ이은중ㆍ김근주ㆍ김호천ㆍ강영훈ㆍ김명균ㆍ박영서ㆍ김용민ㆍ이정훈ㆍ심규석ㆍ박철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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