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휩쓴 '피부색깔-꿀색' 이어 '베이비박스' 영화화 추진

"한인 입양인에게 '동양계 이방인'이란 건 숙명처럼 붙어 다니는 꼬리표입니다.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려고 8년 전부터 상업만화를 접고 나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 사람들이 공감해줘 힘이 납니다."

만화가이면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활동하는 전정식(50) 씨는 해외 입양인이다.

5살 때 벨기에로 입양된 그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입양을 소재로 한 만화와 만화영화를 발표해 두터운 팬을 거느리고 있다.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만화 '피부색깔-꿀색'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세계 3대 애니메이션 영화제로 꼽히는 프랑스 안시(관객상·유니세프상), 크로아티아 자그레브(대상·관객상), 브라질 아니마문디(작품상)를 포함해 지금까지 세계 80개 영화제에 초청됐고 23개 상을 휩쓸었다.

전 씨는 지난달 국제한국입양인봉사회(Inkas·인카스)가 국외 입양 작가와 국내 예술작가와의 만남을 주제로 개최한 '제2회 인카스 국제교류전'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했다.

'피부색깔-꿀색'은 서울시가 중·고등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마련한 '찾아가는 좋은 영화 감상회' 상영작으로 선정돼 8일 강동구 천호동의 천일중학교에서 선보였다. 지난 11월 10일에는 노원구 상경중학교에서도 상영했다.

8일 상영회에 참가한 뒤 연합뉴스 기자와 만난 그는 입양을 소재로 만화와 영화를 만드는 이유를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사무라이 이야기가 나오는 활극 만화를 비롯해 아시아 판타지 등 다양한 상업만화를 그려왔지만 늘 제 뿌리에 대한 궁금증, 버려진 삶에 대한 분노, 다른 피부색에서 오는 소외감 등을 안고 살았습니다. 양부모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외로웠죠.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런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고 제 이야기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입양의 아픔을 그리면서도 그것을 극복하려는 당사자와 사회의 노력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해나가는 겁니다."

2010년 첫 한국 방문 이후 4번째로 모국을 찾은 그는 "경계인으로 살아왔고 한국말도 못하는데 오면 올수록 내가 여기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게 신기하다"며 "돌아가면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배울 생각"이라고 의욕을 내비쳤다.

그는 지난달 프랑스에서 차기작 만화 '피닉스의 여행'을 출간했다. 한국에서는 내년 상반기에 번역본이 나올 예정이다.

"한국인 입양인, 미군 아버지와 한인 접대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나 보육원에서 일하는 여성, 탈북자 등 서로 다른 아픔을 지니고 사는 인물들이 여행을 통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삶이 고통스럽지만 포기하지 않고 이겨내자는 의미에서 '불사조'로 불리는 전설의 새 '피닉스'를 제목으로 달았죠."

전 씨는 차기 애니메이션으로 '베이비박스'를 소재로 한 만화영화를 구상하고 있다. 베이비박스는 미혼모 등 사정이 어려워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한 부모가 사회복지시설 등에 아이를 놓고 갈 수 있도록 마련된 장치다. 쉽게 말하면 아이를 유기하는 상자로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다.

그는 아동의 해외 송출 분야 세계 6위이자 지난 60년간 해외 입양인 누적 1위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한국이 변하려면 국내 입양이 활성화되고 미혼모가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회 분위기와 시스템이 정착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자신을 버린 한국이 못사는 나라도 아니고 경제 선진국이란 사실 때문에 더 상처를 받습니다. 미혼모를 죄악시하고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 탓에 나중에 생모를 찾았는데 안 만나주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차라리 국내 입양이 됐다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을 겁니다."

전 씨는 작품이 널리 알려지면서 모국에서 방송에도 출연했고 생모인 것 같다는 사람도 나타났다. 정확한 것은 DNA 검사를 하면 알 수 있는 일인데 서두르지 않고 있다. 만일 생모가 아니라면 실망감이 너무 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모를 만날 수 있다면 그건 굉장히 기쁜 일이지만 너무 기대를 하거나 찾는 일에 매달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45년을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데다 아내와 딸 등 지금의 가족도 소중하니까요. 다만, 한마디는 꼭 하고 싶어요. 원망하지 않으니 이제 고통의 짐을 내려놓으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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