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33호 비래동 고인돌 ⓒ 강재혁 기자
▲ 대전시 기념물 제33호 비래동 고인돌. ⓒ 강재혁 기자

청동기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을 꼽으라고 하면 대부분 청동검이나 고인돌이 등장한다. 고인돌은 흔히 '족장의 무덤'이라고 한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당시에 구하기 힘들었고 족장의 상징이었던 청동제품들이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됐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거대한 돌로 만들어진 무덤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무거운 물건을 옮길 때 기중기와 같은 중장비를 동원해 쉽게 옮길 수 있다.

반면 고인돌은 기원전에 만들어졌다. 당연히 이 시기에 이러한 것들이 만무했을 것이다. 또한 소와 말 같은 가축들을 사육했다 하더라도 그 수가 공사에 동원할 정도로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추해 볼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바로 부족민들을 동원하는 것이다.

청동기 시대의 족장들은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는 '천손사상'이 있었다. 이들은 부족민들에게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제사를 지낼 때 청동기를 몸에 달아 햇빛에 반사시켜 하늘을 향해 춤을 추었을 것이다.

우리가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청동기를 보면 "이것이 반사가 될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흔히 생각하는 청동기는 푸른빛을 띤다. 그렇지만 이것은 녹슬었을 때 나오는 색깔이다. 보존이 잘 된 청동기를 보면 눈부실 정도로 빛을 잘 반사한다.

"현대인들은 그게 뭐 어때서"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당연히 과학의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어 빛을 내는 물건들을 자주 접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반응이 나올 수 있다.

여기서 현대인의 관점이 아닌 청동기인들의 관점으로 보도록 하자.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빛을 내는 것이 태양과 불밖에 없었다. 이것은 곡물을 익게 하며 추운 밤에도 따뜻하게 해주지만 함부로 다루면 산불과 같은 재난을 발생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연에 신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두려움과 경외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전신에 청동기를 치장한 자가 "나는 신의 자손이다"라고 말한다면 어땠을까? 당연히 햇빛이 청동기에 반사돼 빛이 뿜어져 나왔을 것이다. 당연히 그것을 보고 이들은 그 말을 믿었을 것이며 그를 족장으로 세웠을 것이다.

▲ 비래동 고인돌 출토유물 ⓒ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청동기시대 편
▲ 비래동 고인돌 출토유물. ⓒ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청동기시대 편

족장의 자리는 당연히 세습됐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족장은 그의 자손들이 차지했을 것이다. 이들은 선대 족장의 무덤을 더 크게 만들어 자신들의 세력이 강세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부족민들을 동원해 고인돌을 만들었을 것이다.

고인돌은 대부분 무덤의 용도로 사용됐다. 일부의 경우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 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이나 기념물로 사용됐다. 이번에 소개하는 '비래동 고인돌'도 그러한 용도로 쓰이지 않았나 싶다.

비래동 고인돌은 총 5기로 덮개식(개석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래동 고인돌은 1997년 충남대 박물관이 발굴조사했다. 1호 고인돌에서는 비파형동검, 삼각만입화살촉 5점과 붉은간토기 1점 등이 출토됐다. 2호~3호 고인돌에서는 각각 붉은간토기와 대롱옥이 출토됐다.

▲ 비래동 고인돌 ⓒ 강재혁 기자
▲ 비래동 고인돌. ⓒ 강재혁 기자

이곳에 답사를 왔을 때 강화도 고인돌과 같은 거석이 아닌 조경석과 매우 흡사해 보였다. "이것의 용도가 과연 족장의 무덤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발굴조사과정에서 무덤방의 존재와 비파형동검이 확인돼 이곳의 역할은 족장의 무덤인 것 같다고 본다. 여기에 한 가지 의문점이 있다. 비래동 고인돌이 위치한 산 너머에 대청댐이 위치해 있다.

이곳은 수몰되기전 발굴조사를 통해 선사시대의 흔적이 확인됐다. 또한 근처 지역인 문의에서도 고인돌이 발견돼 청동기인들이 정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곳은 청주시에 소속돼 있어 사람들이 이쪽에 고인돌을 만든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 대전 청동기 유적지 ⓒ 구글지도
▲ 대전 청동기 유적지. ⓒ 구글지도

또한 궁동 유적, 둔산동 유적, 신대동 유적 등의 경우 취락의 흔적이 발견됐다. 물론 이곳은 신대동 유적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앙에 있다.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지금은 길이 잘 닦여있어 교통체증이 없다면 대체로 몇십 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당시 그곳에 거주했던 이들이 한 것일까.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청동기 시대는 전쟁이 시작된 시기다. 장거리를 이동한다면 인근 부족민들의 습격을 받을 수 있어 자칫 잘못하면 부족 전체가 없어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따라서 중앙에 거주하던 부족들이 이곳에 고인돌을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치상으로 볼 때 그나마 신빙성이 있는 것이 신대동 주변에 거주했던 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곳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고인돌이 발견됐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신대동에 고인돌을 만들었으면 굳이 왜 비래동까지 와서 고인돌을 만들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앞서 설명했던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 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 또는 기념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진을 보면 비래동 고인돌 뒤에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장막이자 그 너머로 어떤 것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공간이었을 것이며 그 너머로 넘어온 이들과 전쟁을 벌여 공을 세운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귀한 청동기를 부장품으로 같이 넣었다는 것은 이곳이 그만큼 의미 있는 장소였다는 것이라고 본다.

문화재를 답사를 가는 것은 책으로 보는 느낌과 다르다. 미리 사전조사를 하고 간다면 느낌이 더욱 남달라진다. 그렇기에 꼭 비래동 고인돌이 아니더라도 문화재 답사를 갈 때 미리 사전조사를 통해 문화재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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