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래부성전투 ⓒ 경남도청
▲ 동래성 전투. ⓒ 경남도

조선은 건국된지 200년 동안 국지전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이야 해봤자 여진족과 왜구의 침입만 있을 뿐 그들이 내륙으로 침입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수도에서는 항상 그래왔듯이 단순한 노략질로 보고 그 부분에 대한 강화만 할 뿐 별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중 1555년 5월 명종 10년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보통의 왜구침입은 소규모로 이루어져 지역의 군사력으로 충분히 제압했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들은 대규모 인원을 실은 배 70척을 이끌고 해남군 달량포로 쳐들어왔다. 당연히 이정도의 대규모 왜구들을 상대해본 적이 없었던 조선군은 속수무책으로 격파당했다.

결국 왜구들은 전라남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사건은 조정에서 군대를 파견해 진압됐다.

그 시기 일본에서는 전국시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의 진출을 욕심부리고 있었다.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1592년 동래성에 상륙해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명분으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이 전투에서 오랜기간동안 제대로 된 전쟁을 경험해 본적 없던 조선군은 패하고 말았다. 이 기세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해 조선군들을 차례대로 격파했다.

조정에서는 신립이 이끄는 기마병을 보내 일본군을 격퇴하려고 명했다. 신립은 과거 여진족을 소탕한 경력이 있는 유명한 장수였기에 선조가 믿고 보낸 것이였다. 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은 오랜기간 동안 전쟁을 치루었다. 또한 이들은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군도 바보는 아니었다.

▲ 청주성 탈환 전투 ⓒ 문화재청 칠백의총 관리소
▲ 청주성 탈환도. ⓒ 문화재청 칠백의총 관리소

전쟁 전부터 이미 조총에 대한 사전지식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을 정식 무기로 쓰이지 않았던 이유는 활보다 장전속도가 느렸기 때문이였다. 이것을 노려 조선군이 기마병을 택한 것도 그 이유였다.

이들은 탄금대(현 충주)에 진을 치고 기마병이 유리한 평야에서 이들을 격퇴하려고 했다. 하지만 기마병이 유리한 지형은 조총병에게도 유리한 지형이기도 하다.

과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주였던 오다 노부나가가 나가시노 전투에서 조총병으로 다케다 신겐의 기마병을 격퇴한 경험이 있었다. 이들은 손쉽게 조선군을 전멸시켰다.

일본군은 이 기세를 몰아 점점 더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선의 정규군들은 수군을 제외하고는 일본의 상대로 그리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반면 승리를 거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의병이였다.

의병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군사조직이 아닌 일반 백성들로만 이루어진 비정규군이였다. 그렇다고 이들이 전투에서 매번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본인들이다.

이들이 질적인 면에서 열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지리적 요건을 잘 이용한 면에 있다. 선비들의 주도하에 의병이 나타난점이 있다. 이는 자신들의 생존보다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저항의 몸부림이였던 것이다.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곽재우와 조헌이 있다. 곽재우의 경우 흔히들 '홍의장군'이라고 역사교과서 나오는 인물이다.

반면에 조헌은 교과서에서도 나오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모를 수밖에 없다. 임진왜란 시기 그의 활동을 보자면 임진왜란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제자들과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수백명의 병사들을 모았다.

▲ 금산혈전순절도 ⓒ 문화재청 칠백의총 관리소
▲ 금산 혈전 순절도. ⓒ 문화재청 칠백의총 관리소

조헌은 의병들을 이끌고 임금이 있는 북쪽으로 북상하기 위해 이동하던 도중 차령(천안과 공주를 잇는 고개)에서 처음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그해 8월 1일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 1000명과 합세해 청주성을 공격하여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 일로 선조는 크게 감탄하며 조헌에게 종4품 봉상시첨정과 영규대사에게는 정3품 당상관 벼슬과 단의를 내렸다.

이후 지상전에서 관군에게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은 의병들에게 공격을 받는 것을 모자라 관군들의 역공을 받기 시작했다. 금산성을 점령하던 일본군도 군대를 곰티와 배티를 넘어 전주로 합류하고자 했지만 이 또한 관군들의 반격을 타격을 받았다.

이후 권율이 이끄는 관군과 합세해 18일에 금산에 잔류해 있던 일본군을 소탕하기로 했다. 권율은 이들의 기세가 아직 강세해 군사를 재정비해 다시 소탕하자는 공문을 조헌에게 보냈다.

지금의 편지는 이동수단의 발달로 금방 도착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의 경우 아직까지 도보나 파발로 전달했기 때문에 제 시기에 전달될 수가 없었다.

조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권율의 서안을 받지 못한채 출병했다. 18일 새벽 일본군이 방심한 틈을 타 군사 700명을 이끌고 선제공격을 했다.

▲ 칠백의총 ⓒ 강재혁 기자
▲ 칠백의총. ⓒ 강재혁 기자

이후 일본군의 3번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지만 무기와 훈련의 질 차이로 인해 마지막 총공세에서 조헌과 의병들은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조헌의 제자들이 전투가 일어난지 4일 후 그들의 유해를 모두 수습해 무덤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칠백의총이다.

칠백의총은 선조 36년 '중봉 조선생 일군 순의비'를 세우고 인조25년에는 사당을 세워 칠백인사들의 위패를 모셨다. 현종 4년에는 사당에 종용사라 사액(임금이 사당·서원·누문 따위에 이름을 지어 내리던 일)하고 토지를 내려 매해 제사를 지냈다.

이처럼 칠백의총은 조선의 백성들의 저항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칠백의총은 눈엣가시가 됐다. 과거 자신들의 점령행위를 막은 것에 대한 찬양하는 기념물을 세웠으니 당연히 열불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본인들은 의총과 조용사를 훼손하고 급기야 순의비를 폭파하는 등 항일유적에 대한 철저한 파괴를 일삼았다.

해방이후 1952년 금산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훼손된 의총과 종용사를 재건했다. 또한 1963년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성역화 지시에 따라 지금의 칠백의총이 완성됐다.

현재까지 성역의 면모를 갖춰 칠백의사 호국정신을 이어받게 하고 있다. 6월 호국영령의 달을 맞아 칠백의총을 방문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한 몸 받친 칠백의사의 정기를 받는 것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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