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신 칼럼] 북향민과 한자
[정이신 칼럼] 북향민과 한자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 승인 2021.09.10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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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프타임즈 = 정이신 논설위원) 중간고사에 '안락사에 대한 법리적 공방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가 나왔는데, 안락사라는 말의 뜻을 몰라서 답을 쓰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고 이게 한자에서 온 말인 걸 알았다고 했습니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자신이 해야 할 공부가 엄청난 것 같아서 두렵다고 했습니다. 영어도 벅찬데, 한자까지 해야 하니 막막하다고 했습니다.

가르쳤던 북향민 중에 법학과에 진학한 제자가 했던 말입니다. 지금은 옛 추억으로 기억하는 이야기지만, 북한에서 일어났던 고난의 행군 때에 탈북했던 사람들의 현실을 제가 생생하게 맞닥뜨렸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아, 한문(漢文)까지는 아니더라도, 한자(漢字)는 가르쳐야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저도 잘 모르면서 동양고전을 강독하게 된 계기입니다.

▲ 정이신 논설위원
▲ 정이신 논설위원

저는 한문 공부를 신학대학원에 진학한 후에 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분석하면서 제가 동양인이란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왔습니다. 제 안에 있는 사유방식의 원천이 한국적인 것임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동양적인 사유방식의 끝이 뭔지, 일천한 수준일지라도 직접 원문을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신학대학원 재학 중에 동양학자로 유명한 김○○이 설립해 가르치고 있던 ○○서원의 원생 모집에 합격했고, 그곳을 통해 한문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학 때만 되면 동서양 고전을 강독했던 그곳이 갑자기 없어지는 바람에, 한문 공부를 하고 싶었던 열망을 조용히 삭여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더 늦추면 안 되겠다 싶어서 신학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종로5가에 있었던 한문 서당을 찾아갔습니다.

북향민을 만난 후 법대에 보낸 제자를 통해 알게 됐지만, 북한에서는 한자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한문은커녕 대한민국에서 쓰는 기초한자도 북향민은 잘 몰랐습니다.

북한에서 꽤 유명한 대학에 다니다가 온 사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영어만 알면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대학에 갔다가, 한자를 몰라 낭패를 당한 북향민이 꽤 많았습니다. 그래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옛 교재를 꺼내 들어 재생에게 한자를 가르쳤습니다.

북향민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이틀 동안 세미나를 한다기에 갔더니, 북향민에게 한자까지 가르치면 어려워하지 않느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그들이 염려했던 것처럼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이 땅에서 품격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북향민이 넘어야 하는 언덕입니다.

한자를 가르쳤더니 북향민 제자들이 대학입시에서 합격했다는 소식을 더 많이 전해줬고, 대학에 가서도 성적우수장학생이 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했습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는 인간의 삶에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결정하는 특별한 업보나 창조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의 해석에 따르면 개인은 자유로운 입장에서, 스스로 자신의 존재 방식을 선택하게끔 운명지어진 불안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연은 아주 중요한 사유방식입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의 삶에 우연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우연처럼 보이는 사실이 실상은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필연일 뿐이라고 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공유하는 특정 현상이 창조주에게는 필연이지만, 차원이 서로 다른 우주적인 흐름으로 인해 인간에게는 우연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이걸 따라가면 제가 한문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사건도 제가 잘 모르는, 그렇지만 저를 이끈 흐름의 한 귀퉁이에 있는 창조적인 일입니다.

신학대학원에 다니면서 몸에 있는 울화(鬱火)를 다스리기 위해 우연히 서당이 어디 있는지 물어물어 찾아간 것처럼 보였지만, 이게 뿌리가 돼 지금 아나돗학교에서 실력도 부족한 간사가 기초한자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 모든 게 하나님이 이끄신 길입니다. 오늘도 서툴고 실력 없는 선생을 믿고 따라오는 재생들이 고마울 뿐입니다.

■ 정이신 논설위원·목사 △한양대 전기공학과 졸업 △백석대 신학대학원 졸업 △아나돗학교 대표간사 △아나돗공동체 위임목사 △세이프타임즈에 '노희(路戱)와 더불어 책(冊)놀이' 연재, 칼럼집 <아나돗편지(같이 비를 맞고 걸어야 평화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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